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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우리가 지어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

by 김민식pd 2019. 9. 16.
예능 피디 시절, 일밤에서 <러브하우스>라는 코너를 1년간 연출한 적이 있어요. 당시 건축가들이 집을 고치는 모습을 보며 부러웠어요. 내가 만드는 TV 프로그램은 방송 한번 타고 나면 사라지는데 건축가가 만든 집은 삶을 바꾸고, 오래도록 지속됩니다. 물리적인 결과물을 만드는 건축가가 부러웠어요. 
<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 (로마 아그라왈 지음 / 윤신영, 우아영 옮김 / 어크로스)의 저자는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구조공학자입니다. 옥스퍼드에서 물리학 학사를 받은 후, 전공을 바꿉니다. 물리학자의 길 대신 구조공학자로 돌아선 이유를 묻자 이렇게 답해요. 
"나는 항상 과학과 디자인을 좋아했어요. 공학은 그 둘 사이의 훌륭한 조합이었죠."
어린 시절 레고를 가지고 놀던 소녀가 현재는 서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더 샤드를 포함해 다리와 터널, 기차역을 만드는 구조공학자로 성장했어요. 둘째 민서도 레고 마니아인데요. 나중에 이 책을 소개해줄 생각이에요. '구조공학자라는 직업이 있는데 어때? 이 언니의 삶, 멋지지 않아?'


'새 건축물을 설계할 때, 나는 먼저 건축가가 그린 드로잉을 주의깊게 연구한다. 거기에는 건축물이 완성됐을 때 어떻게 보일지 건축가들이 생각하는 비전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들은 금방 엑스선 영상 같은 것을 만들어서 그림만으로 내부를 들여다보고는 건축물이 중력 등의 힘들을 이겨내고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어떤 뼈대들이 필요한지를 추려낸다. (...) 여기에는 반드시 건축가와 나 사이의 활발한 토론이 뒤따른다. 우리가 답을 찾으려면 서로 타협할 줄 알아야 한다. 건축가가 탁 트인 공간으로 묘사한 곳에 반드시 기둥을 세워야 하는 경우도 많다. 반대로 건축가들이 생각하기에 뭔가 구조물이 있어야 하는 곳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없어도 괜찮은 경우도 많다.' 
(위의 책, 29쪽)

러브하우스를 연출할 때, 건축가와 피디 사이에도 토론이 필요하지요. 건축의 실효성과 방송의 미적 감각 사이에 균형을 찾아야하거든요. 보기에 좋은 집과 살기에 편리한 집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이 이어집니다. 편안한 주거환경을 만들기 위해 많은 전문가들이 고민을 합니다. 책을 보면 그 과정이 잘 나와있어요.
책은 14개 장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층, 힘, 화재, 벽돌, 금속, 바위, 하늘, 땅, 지하, 물, 하수도, 우상, 다리, 꿈 등 모두가 건축물을 만드는 구성 요소입니다. 그중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요소는 물이지요. 지구상에는 마실 물이 귀합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을 축구 경기장 크기에 비유하면, 지표면에 있는 담수호의 크기는 우리 집 소파에 있는 쿠션만 할 것이고 강의 면적은 찻잔 받침 정도가 될 것이다.'
(220쪽)

저자는 비유를 참 쉽게 해요. 이 책이 미국과학진흥회가 <2019 올해의 과학책>으로 선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과학을 쉽고 재미나게 대중에게 소개합니다. 문명은 이렇게 귀한 물을 어떻게 주거 공간으로 끌어들일까 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전을 거듭합니다. 로마의 수도교가 그렇고, 알함브라 궁전의 분수가 그렇고, 이스탄불의 바실리카가 그렇듯, 물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명 발전의 척도였어요. 여행을 많이 다니는 이라면 책 속에서 익숙한 구조물을 많이 만날 수 있어요. 에펠탑, 브루클린 다리, 이스탄불 바실리카 등 인류 건축문화유산을 경이로운 구조공학의 산물로 설명합니다. 책을 읽고 나니 예전에 본 건축물이 다시 떠올라요.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자신의 우상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뉴욕 브루클린 다리를 만든 에밀리 로블링이라는 여성 엔지니어에요. 19세기 후반까지 뉴욕의 브루클린과 맨해튼섬 사이에는 다리가 없었대요. 배로 건넜는데, 강이 얼어붙는 겨울이면 페리가 운행을 멈췄죠. 1869년 브루클린 다리 공사를 시작하는데요. 수석 엔지니어 존 로블링은 사고로 사망해요. 그의 아들이 공사를 이어받지만 병에 걸립니다. 이제 그 아내인 에밀리 로블링이 나섭니다. 당시로서는 여성이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이끈다는 발상이 전례가 없었어요. 하지만 에밀리는 탁월한 엔지니어임을 증명해냅니다. 그 결과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를 건설해냅니다.

'에밀리 워런 로블링은 기술적으로 뛰어났고 함께 일한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다. 프로젝트에서의 역할에 관계없이 다리와 관련된 노동자들은 그녀를 무척 존경하고 존중했다. (...)
그녀는 내게 영감을 준다. 비극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음에도 기술 지식, 노동자와 소통하고 이해 당사자를 설득하는 능력, 고집 등 엔지니어에게 필요한 모든 역량을 활용해 당시 가장 진보한 다리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여성을 하찮게 여기고 침묵시키던 시대에 말이다.'
(280쪽)

언젠가 민서에게 이 책을 권할 겁니다. 민서는 레고를 만들고 조립하는 걸 좋아해요. 지금도 민서 방 침대 위에는 아이가 직접 만든 케이블카가 있어요. 책의 저자이자, 구조공학자인 아그라왈은 민서에게 좋은 우상이 될 것 같아요. 아이도 놀라운 이야기로 가득한 이 재미난 책을 즐겼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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