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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국내여행

전주 경기전 여행

by 김민식pd 2019. 6. 7.
지난 주말, 일이 있어 전주에 갔습니다. 예전에 온 가족이 전주 한옥 마을 스테이를 온 적이 있어요. 오늘은 혼자만의 당일치기 여행입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전주의 명소를 다 돌아봤기에 오늘은 뭘 보나 고민이 됩니다. 이럴 때 저는 관광안내소에 찾아가 여행책자를 구합니다. 전주역에 있는 관광 안내소를 들렀어요. 

전에 왔던 곳을, 다시 보는 방법은 더 깊게 보는 겁니다. 혼자 보는 것보다, 문화 해설사의 설명을 겸해서 다시 보면, 예전에 본 것도 새롭게 보입니다. 지도를 보니 전주 한옥마을 투어가 많아요. 한옥마을 골목길 투어는 매일 11시, 15시에 경기전 정문 앞에서 있고요. 경기전 홍살문에서 모이는 경기전 해설투어는 10시, 11시, 14시, 15시, 16시에 있어요. 14시 경기전 투어와 15시 골목길 투어까지 들어야겠어요.  


3년 전, 온 가족이 한옥마을 투어에 왔을 때는 아이들이 한복을 빌려입고 골목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놀았어요. 다양한 군것질과 남도 음식을 즐겼지요. 아이들은 이벤트를 좋아하고, 마님은 맛집 탐방을 좋아하거든요

이번엔 혼자 왔으니 제 취향 대로 즐겨봅니다. 저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공짜를 좋아합니다.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하는 투어가 무료라니, 딱 제 취향 아닙니까?

집결 장소인 경기전 정문에 갔어요.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니, 해설사님이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두 유 스피크 잉글리시?"
엥?

네, 이국적인 외모 덕분에 자주 겪는 오해지요. 한국어 투어도 있고, 영어 투어도 있어요. 순간, 예스라고 하고, 영어 공부 삼아 영어 투어를 들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칩니다. 옆에 있는 한국팀을 찾아갑니다. 


홍살문에 서서 경기전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 지어진 건물이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의 어진 봉양처를 처음에는 어용전이라고 불리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태조 진전(眞展)이라 하였다가 세종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각각 칭하였다.'

(전주시 문화관광 소개서에서)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열고, 이제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걸 세상에 알리려고 합니다. 그걸 누구에게 어떻게 알릴까요? 고구려와 신라의 옛 수도에 사는 백성들에게 알립니다. 그래서 평양(고구려의 수도)과 경주(통일 신라의 수도)에 각각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지요. 전주에는 왜 왔을까요? 태조 이성계가 전주 이씨니 조상님들의 터전인 전주에도 봉안한 겁니다. 


경기전 뜰에 있는 작은 매화 나무입니다. 수명이 1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이렇게 작아요. 매화는 아름드리 기세를 뽐내거나 하늘을 잎으로 다 가려버리는 나무가 아닙니다. 참 겸손한 나무지요. 이것을 본인을 드러내지 않는 선비정신이라 생각했어요.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신영복 / 돌베개)에서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가는 일, 득위'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득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현재 득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궁금하지요? 득위의 비결을 소개하겠습니다. 개개인의 위(벼슬 位)를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득위의 기본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70%의 자리'가 득위의 비결입니다. "70%의 자리에 가라!" 자기 능력이 100이면 70의 역량을 요구하는 곳에 가는 게 득위입니다. 반대로 70의 능력자가 100의 역량을 요구하는 자리에 가면 실위가 됩니다.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맡은 소임도 실패합니다. '30%의 여유',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여유가 창조성으로, 예술성으로 나타납니다.'

(<담론> 63쪽)

경기전 마당에 있는 100년 된 매화나무. 키작은 나무를 보며, 선비들은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너무 크게 되려고 애쓰지 말자.     

경기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가 있어요. 4개의 복사본을 만들어 전국에 4개 사고에 보관했는데요. 전주사고만 빼고 임진왜란 중 다 소실되거나 파괴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에 소실될 위험이 있었다. 전주사고의 실록을 1592년(선조 25) 6월 22일에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겼다. 이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유신(柳訊), 수직유생(守直儒生)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공로가 컸다.

9월 28일에는 다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다. 전주사고본 실록과 태조 어용은 정읍의 내장산에서 1년 18일을 숨겨 보존하다가 뒤에 해로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으로 옮겨 난을 피하였다.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문화해설사 선생님은 전주사고의 실록이 살아남은 것이 '9급 공무원'의 힘이라고 하셨어요. 경기전 참봉이나 유생이라면, 높은 양반은 아니고요. 그저 말단 관리인데, 나라에 난리가 닥치자 목숨을 걸고 실록을 메고 지고 피난을 떠납니다. 벼슬의 높낮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직업인의 자세겠지요.

현재의 드라마 제작자들은, 이분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한국 드라마의 세계적인 한류 열풍은 <대장금>에서 시작했고요. <대장금> 같은 대하사극이 만들어진 건, 500년의 역사를 꼼꼼히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덕분이지요. 


경기전 정문은 원래 양반만 출입 가능했답니다. 천민들은 함부로 올 수 없었다고. 예전에는 신분에 따라 입장 여부가 갈렸는데, 지금은 매표 여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갈립니다. 돈을 낸 사람은 들어오고, 안 낸 사람은 못 들어옵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자본제 사회로 옮겨온 거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타고나는 신분으로 기회가 결정되는 사회와 가진 돈으로 결정되는 사회, 둘 중 어디가 더 행복할까? 당연히 후자일 것 같은데요. 전자의 경우, 포기가 빠르기에 마음은 더 편할 수도 있어요. 내가 출세하지 못하는 건, 출생 신분 탓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요. 그런데 내가 출세하지 못하는 것이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면 우울하잖아요?

개인의 노력이 강조되는 순간, 세상은 무한경쟁의 장이 되고, 헬조선의 게이트가 열립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생각과 돈 없어도 사는데 문제가 없다는 생각, 둘 중 더 위험한 건 무엇일까요? 저는 전자라고 생각합니다. 돈만 있으면 된다는 사람은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느낄 테니까요. 신분제 사회에서도 타고난 출신 성분에 자족하며 사는 이가 행복하듯, 자본제 사회에서도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사는 이가 행복한 것 아닐까요?

신영복 선생님의 '70%의 자리에 가라'는 말씀이 계속 떠오르는 여행길이었어요. 

어떻게 살 것인가, 항상 어려운 질문인데요. 
그 고민은 전주 한옥마을 골목길 투어에서 이어집니다.

그 이야기는 또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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