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일이 있어 전주에 갔습니다. 예전에 온 가족이 전주 한옥 마을 스테이를 온 적이 있어요. 오늘은 혼자만의 당일치기 여행입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전주의 명소를 다 돌아봤기에 오늘은 뭘 보나 고민이 됩니다. 이럴 때 저는 관광안내소에 찾아가 여행책자를 구합니다. 전주역에 있는 관광 안내소를 들렀어요. 

전에 왔던 곳을, 다시 보는 방법은 더 깊게 보는 겁니다. 혼자 보는 것보다, 문화 해설사의 설명을 겸해서 다시 보면, 예전에 본 것도 새롭게 보입니다. 지도를 보니 전주 한옥마을 투어가 많아요. 한옥마을 골목길 투어는 매일 11시, 15시에 경기전 정문 앞에서 있고요. 경기전 홍살문에서 모이는 경기전 해설투어는 10시, 11시, 14시, 15시, 16시에 있어요. 14시 경기전 투어와 15시 골목길 투어까지 들어야겠어요.  


3년 전, 온 가족이 한옥마을 투어에 왔을 때는 아이들이 한복을 빌려입고 골목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놀았어요. 다양한 군것질과 남도 음식을 즐겼지요. 아이들은 이벤트를 좋아하고, 마님은 맛집 탐방을 좋아하거든요

이번엔 혼자 왔으니 제 취향 대로 즐겨봅니다. 저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공짜를 좋아합니다.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하는 투어가 무료라니, 딱 제 취향 아닙니까?

집결 장소인 경기전 정문에 갔어요.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니, 해설사님이 반갑게 맞아주십니다. 

"두 유 스피크 잉글리시?"
엥?

네, 이국적인 외모 덕분에 자주 겪는 오해지요. 한국어 투어도 있고, 영어 투어도 있어요. 순간, 예스라고 하고, 영어 공부 삼아 영어 투어를 들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칩니다. 옆에 있는 한국팀을 찾아갑니다. 


홍살문에 서서 경기전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경기전은 조선왕조를 연 태조의 초상화, 즉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태종 10년(1410년) 지어진 건물이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의 어진 봉양처를 처음에는 어용전이라고 불리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태조 진전(眞展)이라 하였다가 세종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각각 칭하였다.'

(전주시 문화관광 소개서에서)


조선이라는 새 왕조를 열고, 이제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걸 세상에 알리려고 합니다. 그걸 누구에게 어떻게 알릴까요? 고구려와 신라의 옛 수도에 사는 백성들에게 알립니다. 그래서 평양(고구려의 수도)과 경주(통일 신라의 수도)에 각각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지요. 전주에는 왜 왔을까요? 태조 이성계가 전주 이씨니 조상님들의 터전인 전주에도 봉안한 겁니다. 


경기전 뜰에 있는 작은 매화 나무입니다. 수명이 10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이렇게 작아요. 매화는 아름드리 기세를 뽐내거나 하늘을 잎으로 다 가려버리는 나무가 아닙니다. 참 겸손한 나무지요. 이것을 본인을 드러내지 않는 선비정신이라 생각했어요.

신영복 선생님은 <담론>(신영복 / 돌베개)에서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아가는 일, 득위'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득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현재 득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궁금하지요? 득위의 비결을 소개하겠습니다. 개개인의 위(벼슬 位)를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지만 득위의 기본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70%의 자리'가 득위의 비결입니다. "70%의 자리에 가라!" 자기 능력이 100이면 70의 역량을 요구하는 곳에 가는 게 득위입니다. 반대로 70의 능력자가 100의 역량을 요구하는 자리에 가면 실위가 됩니다. 그 경우 부족한 30을 함량 미달로 채우거나 권위로 채우거나 거짓으로 채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맡은 소임도 실패합니다. '30%의 여유',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여유가 창조성으로, 예술성으로 나타납니다.'

(<담론> 63쪽)

경기전 마당에 있는 100년 된 매화나무. 키작은 나무를 보며, 선비들은 그렇게 생각했겠지요. 너무 크게 되려고 애쓰지 말자.     

경기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가 있어요. 4개의 복사본을 만들어 전국에 4개 사고에 보관했는데요. 전주사고만 빼고 임진왜란 중 다 소실되거나 파괴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병화에 소실될 위험이 있었다. 전주사고의 실록을 1592년(선조 25) 6월 22일에 정읍현 내장산 은봉암(隱峯庵)으로 옮겼다. 이 때 경기전 참봉 오희길(吳希吉)과 유신(柳訊), 수직유생(守直儒生)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공로가 컸다.

9월 28일에는 다시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겼다. 전주사고본 실록과 태조 어용은 정읍의 내장산에서 1년 18일을 숨겨 보존하다가 뒤에 해로로 해주를 거쳐 영변의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별전(別殿)으로 옮겨 난을 피하였다.
(한국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문화해설사 선생님은 전주사고의 실록이 살아남은 것이 '9급 공무원'의 힘이라고 하셨어요. 경기전 참봉이나 유생이라면, 높은 양반은 아니고요. 그저 말단 관리인데, 나라에 난리가 닥치자 목숨을 걸고 실록을 메고 지고 피난을 떠납니다. 벼슬의 높낮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자신이 하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것이 직업인의 자세겠지요.

현재의 드라마 제작자들은, 이분들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한국 드라마의 세계적인 한류 열풍은 <대장금>에서 시작했고요. <대장금> 같은 대하사극이 만들어진 건, 500년의 역사를 꼼꼼히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덕분이지요. 


경기전 정문은 원래 양반만 출입 가능했답니다. 천민들은 함부로 올 수 없었다고. 예전에는 신분에 따라 입장 여부가 갈렸는데, 지금은 매표 여부에 따라 입장 여부가 갈립니다. 돈을 낸 사람은 들어오고, 안 낸 사람은 못 들어옵니다. 신분제 사회에서 자본제 사회로 옮겨온 거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타고나는 신분으로 기회가 결정되는 사회와 가진 돈으로 결정되는 사회, 둘 중 어디가 더 행복할까? 당연히 후자일 것 같은데요. 전자의 경우, 포기가 빠르기에 마음은 더 편할 수도 있어요. 내가 출세하지 못하는 건, 출생 신분 탓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요. 그런데 내가 출세하지 못하는 것이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면 우울하잖아요?

개인의 노력이 강조되는 순간, 세상은 무한경쟁의 장이 되고, 헬조선의 게이트가 열립니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생각과 돈 없어도 사는데 문제가 없다는 생각, 둘 중 더 위험한 건 무엇일까요? 저는 전자라고 생각합니다. 돈만 있으면 된다는 사람은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고 느낄 테니까요. 신분제 사회에서도 타고난 출신 성분에 자족하며 사는 이가 행복하듯, 자본제 사회에서도 가진 것에 만족하고 사는 이가 행복한 것 아닐까요?

신영복 선생님의 '70%의 자리에 가라'는 말씀이 계속 떠오르는 여행길이었어요. 

어떻게 살 것인가, 항상 어려운 질문인데요. 
그 고민은 전주 한옥마을 골목길 투어에서 이어집니다.

그 이야기는 또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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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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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섭섭이짱 2019.06.07 06: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몇 년전 한옥마을 갔었는데.... 이런 공짜 투어가 있는걸 몰랐네요.
    다음에는 꼭 투어해보기로 ^^

    신분제와 자본주의 얘기하시니
    요 근래 계속 머리속에 맴도는
    <기생충> 영화장면들이 떠오르네요.
    어떻게 사는게 맞는건지....
    참 어려운 문제 같아요.

    '70%의 자리에 가라'
    요즘 능력 부족을 절실히 느끼다보니
    제 마음에 어퍼컷을 날리는 느낌이네요 ㅋㅋㅋ

    그 동안 골목길이 어떻게 변했을지
    골목길 투어도 궁금하네요.
    다음 여행기를 조신히 기다려봅니다 ^^

  2. 보리랑 2019.06.07 08:0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푸하핫~ 똑같은 얘기 또 들어도 가족들 사이에서 깔깔 웃어요~ 경기전 출입여부로 헬조선까지, 캬~ 읽은게 걍 넘쳐나오는 이야기꾼 피디님이십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70%의 자리로 가라' 듣고 저는 '아무리 작은 돈을 받아도 최선을 다하라' 떠오릅니다

  3. 꿈트리숲 2019.06.07 08: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여행을 하면서 책 속의 글이 떠올랐다는
    글을 보면서 저 역시 책 속의 글이
    생각납니다.

    며칠 전 본 책에서 경계선 긋기라는 말을 봤어요.
    나는 부자다, 나는 똑똑하다고 선을 그으면
    그 범주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은 무시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어요. 끊임없이 책을 읽고
    내가 그은 그 경계를 계속 확장해 나가야 함을
    강조했는데, 여행을 통해서도 경계가 확장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작가님 책을 통해서, 블로그 글을 통해서도
    제 경계가 확장되는 것 같아요. 전혀 새로운
    내가 탄생되기 보다는 이전의 나를 다 포함하고
    외부의 것도 수용하는 폭넓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즐겁습니다.
    무경계의 사람이 되는 방법 =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

  4. 둥굴레79 2019.06.07 08:4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따님들 너무 귀엽....저도 딸이 둘이고 남편이 딸바보라 굉장히 익숙한 샷이네요..ㅎㅎ
    신영복 선생님의 문장이 '직장에 열정을 내 한계의 70퍼센트 정도만 쏟아라'로 이해되는건 저만인가요...ㅋㅋ 제가 그러는 듯요. 직장에 제 모든걸 붓진 않거든요. 즐기면서 일하려고 그러기도 하고요.

  5. 에가오 2019.06.07 08:5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꿈트리숲님의 경계선 긋기 라는 내용~아주 좋아요~감사해요~^^

  6. 최호진 2019.06.07 10: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전주가 고향이지만 이렇게 세세하게 찾아보고 고민해본 적 없었는데 반성하게 되네요^^ 좋은 이야기와 생각 잘 보고 갑니다!

  7. 봄처녀 2019.06.07 10: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오는 날 읽으니 더 좋네요~ 어떻게 살 것인가....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70% 자리에 가라는 말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8. 아리아리짱 2019.06.07 10:5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PD님 아리아리!

    같은 장소를 여행하여도 생각의 깊이와 폭이 다름을 실감합니다.
    현재 우리가 즐길 수 있는 <대장금>이 조선시대 9급 공무원의 힘 이었군요..ㅋㅋ
    저도 신영복 선생님의 자신에게 맞는 자리 찾아가기'70%의 자리에가라'에 공감합니다.

    신분제에서 자본제사회로 모든 기준이 '돈'의 유무로 갈라지는 사회
    이 또한 계층간의 구분이 명확하여 또다른 계급사회를 형성하는 현재입니다.
    '기생충'에 박사장(이선균분)이 "선"을 넘지 말 것을 강조하는 대사가 떠오릅니다.
    끝없이 독서와 여행을 통해 경계의 선을 확장하고, 선 밖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여유와 공간이 필요한 듯합니다. 저 또한< 내 모든 습관은 여행에서 만들어졌다 >로 함께합니다. ^^

  9. 은하수 2019.06.07 11:3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둘째 따님을 한껏 끌어안고 행복해하시는 모습에 저도 미소가 번집니다. 두 따님이 자랑스러우시겠어요.
    전주에 일이 있어 가는데 전주한옥마을 여행하는 여유로움과 계획성...
    그냥 휘 둘러보며 맛있는거 먹고 찍고 오는 여행이 아닌 역사공부와 사색까지...것도 공짜로ㅎㅎ
    저도 항상 느끼는거지만 공짜 프로그램들 참 잘 되어 있어요~ 굳이 비싼 돈 안들여두요.

  10. 도전하는 삶 2019.06.07 12: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른 강의 듣다가 우연히 세바시 강연듣고 PD님을 알게되었습니다.
    책을 주문하고, 이곳을 찾아 왔어요.
    저도 제가 좋은하는 일을 찾아 매일 즐기며 살아보려 합니다.
    다양한 이야기와 좋은 책과 강의들 기대하겠습니다.

  11. 오달자 2019.06.07 15:2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두 유 스피트 잉글리쉬?" 에 또 뽱터짐요~ ㅎㅎ
    여행 후기를 자학 개그로 시작하시는 피디님 특유의 스타트~~^^
    재미있어요~ ㅋㅋ
    그래도 이젠 그 자학개그...안먹혀요.
    자학개그할 만큼의 미모는 아니시기에~~ ㅎㅎ

    "자신에게 맞는 자리 찾아가기.70%의 자리 찾아가기"
    사실은..요 근래에..
    딱 제 능력의 70%가 되는 자리를 찾은거 같거든요^^
    그래서 굉장히 일이 즐겁습니다.^^

    재미있는 일이 본업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말씀 하신 피디님 어록이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12. 늘봄나봄 2019.06.07 16: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드디어 광고 붙이셨네요. 잘하셨습니다.!! 축하드려요
    글 읽으면서 광고 적용했으면 했는데요~ㅎ

  13. 인에이 2019.06.08 01:1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보고 갑니다^^

  14. 냥냥 2019.06.09 23: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 pd님 글 잘 읽었습니다~:) '70%의 자리에 가라' 가슴에 와닿네요~! 처음 pd님 블로그에 와서 댓글도 남겨보아요~ pd님의 영어책 한권 외워봤니? 를 보고 영어회화 100일의 기적 책 외우기를 실천하고 있고 지금은 매일 아침 써봤니? 를 보고 있습니다. 책을 다 보기도 전에 글쓰기에 도전해 봐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제가 원래 책도 잘 안읽고 글은 기념일때 카드정도? 인스타그램에 사진올릴때 짧은 글정도 밖에 안적어본 사람인데.. 올해 어떤 책을 읽고 책 읽기가 좋아졌고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차에 pd님 책을 읽고는 글쓰기를 제대로 실천 해봐야겠다는 확신이 들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 한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어요~ 보통 블로그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n사 블로그를 많이들 하잖아요~ 많이도 하고 사용하기 쉽기도 하구요.. pd님은 특별히 티스토리 블로그를 하는 이유가 있을까 궁금해 졌어요~ 혜안이 있으신 pd님이시라 이유가 있을것 같아서요~ ^^ 답변 주시면 넘넘 감사할거 같아요~~^^ pym081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