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를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공대로 진학한 저는, 전공 수업이 괴로웠어요. 석탄채굴학이나 석유시추공학 수업이 너무 재미없어서, 강의실 뒤쪽에 앉아 스티븐 킹이나 시드니 셀던 같은 작가의 소설을 영어 원서로 읽었어요. 혼자 독학하는 영문과 전공자라고 생각했지요. 영문과 학생들이 그렇게 부러워 수업을 청강하기도 했는데요. 강의실에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영문과 학생들의 수업 자세가 바로 공학관에 앉아있는 제 모습과 똑같은 거예요. 수업이 지겨워 뒤에 앉아 딴짓 하는 친구들을 보고 깨달았지요. '아, 누구나 자신에게 없는 걸 갈망하기만 하지, 자신이 가진 걸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없구나.'
영어 작문을 공부하는데 있어, 최고의 방법은 영어로 일기를 쓰는 일입니다. 영문과 교수로 재직한 장영희 교수님은 영작문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영어로 일기를 쓰게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걷어서 점검을 하셨대요. 일기 내용 중에는 사랑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자주 대하는 것은 짝사랑에 대한 고뇌와 슬픔 또는 좌절감이다. 남보다 잘생기거나 예쁘지 못해서, 키가 작아서, 집안이 가난해서,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라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혼자 누군가를 짝사랑하면서 괴로워하거나 지독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해준들 위로가 되겠는가마는, 내가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의 슬픔에 취해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짝사랑이야말로 젊음의 특권, 아니 의무라는 사실을 말이다. (...)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격하지 않고, 슬픈 것을 보고 눈물 흘리지 않고, 불의를 보고도 노하지 않으며, 귀중한 것을 보고도 탐내지 않는 삶은 허망한 것이리라. (...)
짝사랑이야말로 성숙의 첩경이며 사랑 연습의 으뜸이다. 학문의 길도 어쩌면 외롭고 고달픈 짝사랑의 길이다. 안타깝게 두드리며 파헤쳐도 대답 없는 벽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감을 느끼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자만이 마침내 그 벽을 허물고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승리자가 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여, 당당하고 열정적으로 짝사랑하라. 사람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고, 학문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저 푸른 나무 저 높은 하늘을 사랑하고, 그대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을 열렬히 사랑하라.'
(<사랑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154쪽)
우리는 다들 청춘의 시기를 부러워하고 샘내지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우리의 현재가 부러운 시기인지 몰라요. 요즘 제가 탁구를 열심히 배우는 중인데요. 동네 문화 센터에서 탁구를 치는 분들 중에 노인이 많아요. 구기 종목 중 70에도 즐길 수 있는 운동이 탁구지요. 70에, 농구나 축구는 좀 힘들 것 같잖아요? 탁구가 좋은 건 실내 운동이고 행동반경이 크지 않아, 나이 들어서 하기에도 무리가 없어요.
70에도 펄펄 날아다니는 분이 있는데요, 하루는 시합을 하다 상대편이 자꾸 강스매싱을 먹이며 득점을 하자 버럭 하시더군요.
"아니, 젊다고 너무 막 하는 거 아냐?"
저, 그 순간 웃겨서 죽는 줄 알았어요. 상대방은 60대 노인이었거든요. 70 노인이 60 노인을 보며 늘 부러워합니다. "야, 좋을 때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저렇게 잘 칠 수 있는데." 아마 요양병원에 있는 90 노인은 70 노인을 부러워하겠지요. "탁구장에 나갈 수만 있어도 복인겨."
장영희 선생님 말씀대로 제가 몸 담고 있는 일상을 열렬히 사랑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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