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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테드 창의 신작, <숨>

by 김민식pd 2019. 5. 31.

서커스 공연을 좋아합니다. 지난 어린이날 연휴 민서와 서울 서커스 축제에 갔어요. 저는 마술보다 서커스를 더 좋아합니다. 마술은 트릭의 정체를 알고 나면 시시합니다. 마술은 사실 장비 싸움이에요. 더 좋은 마술장비를 가진 사람이 더 놀라운 공연을 보여주지요. 상자에 숨은 2중 수납공간이라든가 겹쳐진 반쪽짜리 카드의 정체를 알고 나면 시시해집니다. 서커스는 달라요. 서커스는 눈속임이 아닙니다. 훈련을 통해 단련한 기술입니다.

어려서부터 서커스를 좋아한 제게는 무척 즐거운 공연이었는데요. 정작 민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아이는 서커스가 주는 긴장이 싫은가 봐요. 높은 장대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바닥에 거의 닿을랑 말랑 하는 장면은 무서운 거죠. 민서가 가자고 해서 중간에 나왔는데요. 아쉬웠어요. 내년 서커스 축제는 혼자라도 다시 오려고요. 어려서 본 서커스는 기술이었는데, 요즘의 서커스는 예술에 가깝습니다. 최근 책 한 권을 읽다가 저자의 필력이 마치 서커스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바로 테드 창입니다.

SF 작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평생 읽은 책 중 가장 좋아하는 책 10권 중에 들어가는 작품이에요.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어도 또 재미있습니다. 그가 새로 책을 냈어요. <> (테드 창 / 엘리)

중단편집인데요, 첫 번째 수록작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을 읽으며 감탄했어요. 테드 창은 마치 스탠리 큐브릭을 연상케하는 작가입니다. 큐브릭은 만드는 영화마다 장르 최고의 걸작을 만들었지요. 그가 공포 영화를 만들면 <샤이닝>, SF 영화를 만들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전쟁 영화를 만들면 <풀 메탈 자켓>이에요. <로리타><시계태엽 오렌지>도 장르가 완전히 다른 영화지요. 그는 매번 다른 장르에 도전하는데요, 테드 창도 비슷합니다. SF 소설에도 다양한 서브 장르가 있어요. 인공지능, 슈퍼 히어로, 외계문명 등. 그는 다양한 서브 장르마다 한 편씩 걸작을 써내요.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은 시간 여행을 주제로 한 SF인데요.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한 편처럼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책을 읽다 문득 서커스의 한 장면이 떠올랐어요. 공과 촛대와 칼을 공중에 띄워 올리고 또 받아내는 저글링. 보면서도 눈을 믿기 힘들죠.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테드 창의 소설이 그래요. 페이지를 넘기며 감탄합니다.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을까? 공을 허공에 너무 많이 던져올리면, 감당하기 힘들죠. 이야기도 그래요. 너무 크게 벌려놓으면 나중에 마무리가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은데요. 테드 창은 아무리 크게 벌려놓은 이야기도 다 깔끔하게 정리해냅니다. 마지막 반전을 보며 이마를 쳐요. 그가 전 세계 과학소설계의 보물이라는 찬사를 받고, 역대 최연소 네뷸라 상 수상을 한 것도 다 이해가 갑니다. 책을 읽다 문득 목차로 가서 수록된 작품의 수를 세어봅니다. 9편이 수록되었군요. 하루에 한 편씩 아껴가며 읽어야겠어요.

저는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데요. 그때, 확실하게 재미난 책 한 권을, 검증되지 않은 책들 사이에 끼워 읽습니다. 이제 <>은 한 숨 돌리라고 놔두고 다른 책을 읽어요. 그 책이 재미있으면 로또 맞은 기분입니다. 이제 확실하게 재미난 책이 2권이 되었으니까요. 그 책이 별로면, 바로 다음 책으로 갑니다. <> 말고 또 재미난 책을 찾아 헤매는 거죠. 그러다 계속 실패하, 믿음직한 <>으로 돌아옵니다

두 번째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을 읽으면서, 어느 순간 전율을 느낍니다. ‘, 이런 이야기였구나!’ 우리의 삶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주의 생성에 관한 비밀과 생명의 탄생에 따른 신비에 대한 우화에요. 우리는 늘,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하지요. 그런데 나만의 노력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그럴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SF를 읽으면서 우리 존재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민을 해 봅니다. 이게 테드 창이지요한동안 <> 덕분에 숨쉬기 벅찰 정도로 행복한 날들이 이어질 것 같아요.

 

탐험자여,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에 대해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권리가 내게는 있다고 느낀다. 지금 이 글을 각인하면서, 내가 바로 그렇게 묵상하고,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책, 87)

 

여러분께, 테드 창을 권하는 제 기분입니다. 테드 창을 아직 몰랐다는 사실에 기뻐하셔야 합니다. 앞으로 만날 놀라운 즐거움을 아직 남겨두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작가가 이토록 부지런하게 글을 쓴다는 것은 독자로서 큰 복이지요.         


'전 세계가 기다려온 테드 창의 귀환!'

책벌레의 즐거움도 함께 찾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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