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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by 김민식pd 2019. 5. 29.
그러니까, 시작은 넷플릭스였어요. 

넷플릭스에 올라온 <러브 데스 로봇>을 봤죠. 러닝타임이 회당 15분 정도인 단편 모음이라 부담없이 봤습니다. 저는 장편 시리즈에 빠지는 걸 두려워해요. 책 읽을 시간과 영화 보는 시간을 가지고 늘 고민합니다
<러브 데스 로봇>의 첫 회, '무적의 소니'를 보고 반해버렸어요. 구글 검색을 해보니, 원작인 영문 단편 소설이 있더군요. 바로 읽었지요. 멋진 영상을 보면, 그 원작 소설을 찾아 읽어봅니다. '나라면 어떻게 영상화했을까?'
각본가의 이름도 유심히 살펴봤는데요. 그러다 반가운 이름을 만났어요. '존 스칼지'라고 제가 좋아하는 <노인의 전쟁> 시리즈를 쓴 작가가 참여한 작품이네요. 문득 존 스칼지의 근황이 궁금해 검색해보니, <노인의 전쟁>은 넷플릭스에서 판권을 사서 영화화중이라는군요. <스타 워즈>나 <스타 트렉>같은 멋진 우주 전쟁물이 나오길 기대해봅니다. 
존 스칼지가 새로 쓴 시리즈가 있기에 찾아 읽었어요. 

<무너지는 제국> (존 스칼지 / 유소영 / 구픽)

아, 책을 읽다가 웃겨 죽는줄 알았어요. 전철에서 책을 읽다 혼자 미친듯이 웃었어요. 정말 민망하더군요. 존 스칼지는 SF 스페이스 오페라 작가입니다. 새로운 캐릭터나, 개그, 유머 코드를 만드는 것도 능하지만 새로운 세계관을 만드는 사람이지요. 제가 SF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에요. 상상력의 스케일이 달라요. 거대한 우주 서사시를 펼쳐놓다가 어느 순간, 예상치못한 개그를 툭 치는데, 뒤집어집니다. 아, 정말 전철 안에서 사람들 눈치 보여서 혼 났어요. 어떡하나요, 그래도 책 읽기는 전철이 제일 좋은데... (저는 소심해서, 전철에서 넷플릭스는 잘 못 봐요. 갑자기 야한 장면이 나오면 민망해서 혼자 얼굴이 빨개집니다. 제가 특별히 그런 장면이 나오는 걸 고르는 건 아닌데 말이죠... 쿨럭... 넷플릭스가 섹스 코미디를 자꾸 추천해주는 걸 보니 제 취향을 간파당했나봐요...)  

<무너지는 제국>은 말 그대로, 은하 제국 하나가 무너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국의 위기를 앞두고 신임 황제가 찾아가는 곳이 있어요. '기억의 방' 선대 황제들의 뇌를 스캔하여, 데이터베이스로 만든 곳이에요. 오로지 황제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 황제가 선대 조상들에게 자문을 구할 수 있는 곳이지요. 제국의 황제들중에 현명한 사람이 많아요. 왜 그럴까요? 자신이 한 모든 행동은 후손들에게 기억의 형태로 전해질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스스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조선왕조실록'은 참으로 위대한 통치 행위라고 생각해요. 왕의 행실이 하나하나 기록된다는 것은, 왕권에 대한 견제장치일 것입니다. 가장 큰 힘을 가진 이가, 스스로 타락을 막기위해 심은 장치가 아닐까 싶어요. 권력은 언제 타락할까요? 견제와 감시 기능이 사라지면 그래요.

엣날에는 지식의 독점이 곧 권력의 독점을 보장했어요. 갑골문을 쓰고 읽는 이들이 하늘의 계시를 해석할 수 있었고요. 조선시대에도 중국의 글자를 읽고 쓰는 이들이 관직을 독점했지요. 중세 교회는 라틴어로된 성경만을 고집하며, 하느님의 언어를 독점합니다. 민주화란 정보의 공유와 함께 시작됩니다.
 

<무너지는 제국>의 주역들은 여성들입니다. 새로운 황제는 여황제고요. 황제를 돕는 상인 가문의 영주 역시 여성입니다. 그 가문의 후계자 역시 여성입니다. 어머니가 악당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키바는 경탄한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마 라고스는 언제나 감히 거슬러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고, 키바는 오랫동안 그런 어머니가 논쟁하고 협상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의 기술을 갈고 닦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미트 노하마페탄 같은 작자를 능숙하게, 욕설을 섞어가며 막다른 골목에 밀어붙인 뒤 목을 졸라버리는 광경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다.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 부모를 올려다보며 '어른이 되면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무너지는 제국> 326쪽)

육아의 궁극적인 목표겠지요. 아이에게 존경받는 어른이 된다는 것. 이 책을 읽으며 무척 즐거웠어요. 다시 존 스칼지의 다른 책을 찾아봅니다. <휴먼 디비전>이라고, <노인의 전쟁> 시리즈의 최신작도 나와있군요. 만약 존 스칼지를 처음 접한다면, <노인의 전쟁>부터 읽으시라고 권해드립니다. <무너지는 제국>은 별개의 시리즈니 부담없이 접할 수 있어요. 많이 찾아 읽으시길 바랍니다. 이 책이 잘 팔려야 후속작도 나오겠지요. 존 스칼지의 국내 팬이 늘어나, 스칼지의 모든 작품이 번역되기를 소망합니다.

넷플릭스에서 시작한 독서는, 꼬리를 무는 시청이 아니라, 꼬리를 무는 독서로 이어집니다.

이게 책벌레가 사는 낙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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