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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날라리 영화 감상문

저렇게 나이들고 싶다

by 김민식pd 2019. 4. 2.

영화 <라스트 미션>을 봤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나이 90에 감독과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된 영화입니다. 몇 년 전, <그랜 토리노>를 보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카우보이가 보내는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했는데, 이 감독님, 아직 떠날 생각은 없으신가 봅니다. 현역으로 계속 멋진 영화를 만들어냅니다. 

영화의 원제는 Mule이에요. 노새이지요. 암말과 수탕나귀와의 사이에서 난 잡종인 노새는 생식 능력이 없는 짐승이지요. 일만 하다 갑니다. 영화에서 '노새'는 마약을 운반하는 짐꾼이라는 뜻이에요. 미국에서 80대 고령의 트럭 운전사가 마약을 운반하다 잡힌 실화에서 영감을 얻었답니다.

한국어 제목은 <라스트 미션>이에요. '마지막 임무'라니까 액션 활극 같지요? '황야의 총잡이'로 이름을 떨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노년에 멕시코 마피아나 마약단속국 사이에서 최후의 결투를 벌이는 느낌... 그런데 영화를 보면 원제인 '노새'가 느낌을 더 잘 전달합니다. 늙어죽도록 일만 하는 노인의 이야기...

혼자 조조 영화를 보러 갔더니 사람이 없었어요. 자리에 앉는데, 옆에 앉은 분이 저를 빤히 보는 거예요. 낯가림이 심한 저는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분이 그러셨어요. 

"민식이 아니니?"

세상에, 퇴직한 회사 선배님을 영화관에서 만난 거죠.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를 보면, 쇼 연출의 대가이신 신종인 선배님이 AFKN에서 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라이브로 보느라, 조연출인 제게 동시통역을 시키고, 나중에 국장이 되어서는 제게 시트콤 연출의 기회를 맡기는 일화가 나오는데요. 바로 그 신종인 국장님입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여쭤봤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70대인 선배님은 요즘 중국어 공부에 빠져 사십니다. 강남역 근처 중국어 학원을 다 다니셨대요. 파고다, YBM, 차이나탄, 거기다 공자학당까지. 1단계에서 시작해 5단계까지 마치면, 다른 학원에 가서 다시 중간 단계에서 새로 시작한다고요. 휴대폰 문자를 중국어로 보내시더군요. 제게 휴대폰에서 중국어 문자 입력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어요. 

76년에 MBC 입사하신 선배님 아래서 일을 배웠습니다. 연출 시절, 일화가 많은 분이에요. 일에 대한 열정이 엄청난 분이셨죠. 그런 분이 국장이 된 후, 제게 논스톱을 맡기셨는데요. 단 한번도 제 일에 참견하신 적이 없어요. 당신이 연출 시절 하고 싶은 건 다 해보고 살았기에, 연출은 남의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으셨어요. 국장님 덕에 저는 즐겁게 일했어요. 이제는 선배님에게 즐거운 노후의 지혜를 배웁니다.  

젊어서 좋아하던 배우가 나이 90에 영화를 만들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같이 극장을 찾아오고, 매일 어학원에 가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정해진 시간마다 소리내어 회화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는 삶. 나이 들어서도 호기심과 즐거움을 잃지 않는 삶. 선배님을 보며 느꼈어요. 평생 열심히 산 사람에게 <라스트 미션>이란 별 거 없구나.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나, 조용히 공부를 하고 취미를 즐기는 것로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라스트 미션>도 멋있지만, 한 예능 프로그램의 대가가 보여주는 <라스트 미션>도 멋있네요. 

저도 선배님처럼 취미를 즐기고, 공부하며 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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