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짜 PD 스쿨/날라리 영화 감상문

누가 진짜 영웅인가?

by 김민식pd 2019. 5. 16.

(<어벤져스> 시리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싫어하시는 분은 오늘 글은 건너뛰셔도 됩니다.) 


<어벤져스 3: 인피니티 워>의 경우, 극장에서 세 번 봤습니다. 개봉하자마자 조조로 한 번, 아내와 극장 데이트로 한번, 그리고 개봉 막바지에 아이맥스로 한번. 좋아하는 영화는 개봉할 때 일반 버전으로 한번, 내리기 직전에 아이맥스로 다시 한번 보는 게 저만의 영화 감상법입니다. 

<다크나이트>나 <어벤져스>같은 화제작은 개봉 초반에 아이맥스로 좋은 자리 구하기 쉽지 않아요. 그럴 때는 그냥 일반판으로 봅니다. 그런 다음 2~3주가 지나고 열기가 가라앉으면 아이맥스로 다시 보지요. 

방송 문법을 전공한 적이 없기에 저는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서 영상 연출을 공부합니다. 처음 볼 때는 그냥 스토리에 집중해요. 두번째 볼 때는 시나리오의 복선이나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면서 공부하듯이 봅니다. 

일반 화면은 횡으로 길고, 아이맥스 화면은 종으로 깁니다. 즉 아이맥스의 경우, 자막이 저 화면 아래 바닥에 있어요. 위에서 일어나는 액션과 아래에 적힌 자막을 번갈아보기에 좋은 화면비율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이맥스를 볼 때는 자막을 읽지 않고 가급적 화면에 집중합니다. 처음 볼 때는 저도 리스닝이 딸려 못 알아듣는 대목이 많아 자동으로 자막으로 시선이 갑니다. 그래서 아이맥스는 두번째 관람용으로 봅니다. 

같은 영화를 세번 정도 보면, 혼자서 킥킥 웃게 되는 지점이 생겨요. <인피니티 워> 초반, 로키가 타노스에게 "We have a Hulk."라고 하는 대목에서 혼자 빵 터졌어요. 어벤져스 1탄에서 토니 스타크가 로키에게 같은 대사를 들려주지요. 그 충고를 무시한 로키는...

 


떡이 됩니다.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이 개봉한 첫 날, 달려가 영화를 봤어요.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일까요? <인피니티 워>의 대규모 액션씬에 경도된 탓일까요? <엔드 게임>을 보고 나오며, '화장실 가고 싶은 걸 참아가며 3시간이나 견딜 이유가 있나?' 싶었어요. 솔직히 중반에는 너무 늘어졌어요. 과거로 돌아가 아버지나 옛 연인을 만나는 장면만 덜어냈어도 상영 시간은 줄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그러다 아내와 주말에 영화를 다시 봤어요. 같은 영화도 2번을 보고 나니 느낌이 달라집니다. 이번에는 중반 이후, 그 지루했던 대목에 좀 더 깊이 이입하며 봤어요. 압도적인 절망감을 히어로들은 어떻게 극복하고 있을까? 가장 잘 극복한 예는 캡틴 아메리카고요. 가장 망가진 예는 토르입니다. 둘의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요?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져스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영웅입니다. <퍼스트 어벤져>를 보면, 2차 대전 당시 징병 검사에서 연거푸 탈락할 정도로 약골입니다. 하지만 애국심과 책임감, 도덕적 정의감만은 강하지요. 그래서 슈퍼 솔져 실험에 발탁됩니다. 실험 피험자를 고르는 박사의 기준은, 도덕심입니다. 힘만 세고, 정의가 부족한 사람에게 슈퍼 파워가 주어지면, 악당이 될 수도 있어요. 약자의 설움을 아는 사람에게 힘이 주어져야 진짜 영웅이 탄생합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캡틴 아메리카가 <엔드 게임> 막바지에는 의외의 선택을 합니다. 왜 그런 걸까? 오래전에 극장에서 본 <퍼스트 어벤져>를 주말에 다시 찾아봤습니다. 영화 초반에 귀에 익은 대사가 나옵니다. 

"I can do this all day."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 <퍼스트 어벤져>에서 이 말을 하는 스티브 로저스는 약골입니다. 동네 깡패에게 얻어터지는 데요. 그럴 때마다 그는 다시 일어납니다. 맞고 쓰러지는 걸 하루 종일 할 수 있다는 거죠. 이게 진짜 캡틴 아메리카의 강점입니다. 그는 강해서 영웅이 된 사람이 아니에요. 약골이지만, 늘 맞고 줘터지는 사람의 심정을 알기에, 약자를 지키는 슈퍼 히어로가 된 겁니다. 

반면 토르는 '천둥의 신'입니다. 그는 태생부터가 범상치 않아요. 아스가르드 왕국의 왕자로 태어났고, 노르웨이 신화에서는 신으로 숭배받는 인물입니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가장 강한 어벤져'가 바로 토르지요. 그 일격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타노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다음 번에는 머리를 노려."

<엔드 게임>에서 토르는 타노스의 말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지만, 이후 망가집니다. 캡틴은 패배 후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찾아서 합니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위로를 나누는 심리 치료 모임을 엽니다. 토르는 반대로 사람들을 피해 혼자 칩거하며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요. 

어려서부터 약골로 살며 늘 상처와 좌절을 달고 살았던 스티브 로저스와, 왕자로 태어나 신으로 숭배받던 토르가, 궁극의 패배 앞에 어떻게 변하는가를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승승장구하다 한번의 실패로 무너지는 사람과, 좌절할 때마다 다시 일어나 "I can do this all day."라고 말하는 사람, 둘 중 누가 진짜 영웅일까요?  


마블의 영화는 가벼운 액션 히어로물이라고 넘기기에는 아까운 작품이 많아요. <퍼스트 어벤져>의 경우, 개봉했을 때 흥행은 저조했어요. 생각해보면, 마블은 처음부터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지난 11년 동안 나온 22편의 마블 영화를 다시 볼 생각입니다. 21편을 다 본 후에는 <엔드 게임>을 아이맥스로 보며 작별 인사를 다시 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모두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