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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세계여행

런던 도보 여행

by 김민식pd 2018. 9. 28.

지난 2월에 다녀온 런던 출장 때 쓴 글입니다. 드라마 연출하느라 글을 다듬을 시간이 없어 이제야 올리네요. 저는 출장 가서 짬이 나면 시내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런던 시내의 경우,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 안에 볼 게 많아요. 

벌링턴 아케이드 - 로열 아카데미 - 피카딜리 서커스 - 세인트 제임스 교회 - 버킹엄 궁전

한번에 다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데요. 다만 새 운동화를 신고 온 건 실수였어요. 신던 운동화에 구멍이 나서 새 운동화를 신고 왔는데, 아직 길이 들지 않아 발이 아파요. 서울에서라면 발이 아프면 다음날 다른 신발로 갈아신으면 되는데 여행 와서는 그게 안 되니... 역시 여행 갈 때는 길이 잘 든 신발을 챙겨가는 게 중요합니다.

나름 여행을 많이 했는데, 이번 여행은 출장을 겸해 급하게 오느라 실수가 많네요. 두번째 실수는 두꺼운 외투에요. 2월의 런던은 아직 춥다고 해서 출발할 때 여러겹의 옷을 껴입었거든요. 그런데 아내가 출장 가는 사람이 무슨 차림이 그러냐고, 정장에 코트를 입으라고 해서... ㅠㅠ 두꺼운 코트를 입고 왔는데 와서보니 날이 풀려서 심지어 반팔입고 다니는 사람도 눈에 띕니다. 

박물관 구경할 땐 실내가 더워서 심지어 들고 다니고 있어요. 겨울 여행에 가장 좋은 복장은 얇은 파카 안에 플리스 털자켓을 입고 그 안에 히트텍 등 여러 벌의 옷을 겹쳐입는 거죠. 추우면 껴입고, 더우면 한겹 벗고...

버킹엄 궁전입니다. 궁전 앞 그린 파크 공원에 앉아 쉬는데 노숙자가 혼자 쉼없이 떠듭니다. 뭐라하는지 궁금해서 귀를 기울여봐도 뭐라는지 모르겠어요. 이야기가 중구난방인지라... 사람은 힘들면 허구의 세계로 망명을 떠나나봐요. 저는 힘들 때 소설을 읽는데, 노숙자는 힘들면 혼자 소설을 쓰는군요. 

노숙자가 가니 일본 여자애 둘이 와서 옆 벤치에서 도시락을 까먹습니다. "맛이 어때?"하고 물었나봐요. "와루꾸 나이. 와루꾸 나이." 그러는데 순간 노홍철인줄 알았어요. 일본어로 "나쁘지않아, 나쁘지않아."라는 뜻이거든요. 혼자 외국 여행 오면 고시랑고시랑 수다를 엿듣는 재미가 있어요. 심심하니까 주위 사람들 모든 이야기에 다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다시 트라팔가 스퀘어에 있는 내셔널 갤러리까지 걷습니다. 미술 교과서에서 본 작가들이 다 있군요. 고흐, 모네, 다 있어요. 영화 <러빙 빈센트>를 본 직후라, 고흐의 그림이 다시 보입니다. 고흐 그림의 특징은 노동이지요. 수많은 붓질로 사물의 모양을 잡고 채색합니다. 마치 노동하듯이 꾸준히 일하는 화가에요.

모네 수련 앞에 서있는 70대 영국 할머니의 기품 있는 눈매가 인상적이었어요. '참 나이 들어도 멋진 표정을 갖고 사시네' 했어요. 나중에 온 남편과 대화를 나누는데, "어머나, 세상에! Oh, my gosh!"를 연발하고 있어요. 경탄하는 힘이 삶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 걸까요? 그 할머니의 표정에 생기가 가득했던 건 그림 한 장에 감탄을 연발하는 그 힘에 있는 건지 몰라요.


'레이디 제인의 처형'이라는 그림이에요. '9일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비련의 주인공이지요. 이 그림을 그린 프랑스 화가는 영국 왕족의 비극을 자주 그렸답니다. 당시엔 걸핏하면 처형당하는게 왕족의 운명이었어요. 

옛날에 이런 그림들을 볼 수 있는건 돈많은 부자나 왕족만이 누린 호사입니다. 어쩌면 현대인은 중세 왕족보다 더 잘 먹고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사는게 아닐까요? 그랜드 투어 역시 귀족들의 호사였지요. 이제 어지간한 여행자들이 옛날 귀족들보다 더 많은 곳을 다니고 더 재미난 것을 봅니다. 

다음날 영국의 방송산업 관계자들 앞에서 한국의 드라마 시장에 대한 소개를 영어로 하기로 했어요.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 되더군요. 옛날엔 내셔널 갤러리에 걸린 그림을 보는 것이 귀족들이 누린 사치였어요. 지금도 런던에서 뮤지컬을 보는 건 비용이 꽤 듭니다. 싼 것도 7,8만원해요. 뮤지컬을 즐기기 위해선 영국 런던까지 와야하지요. 그게 다 비용이고 시간입니다. 

그에 비하면 한국 드라마는 어떤가요? 전세계 어디에서나 많은 사람이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드라마를 즐기고 있어요. 공연이나 다른 예술에 비하면 거의 무료에 가까운 가격으로요. 한국의 드라마 산업을 주도했던 건 공영방송인 KBS와 MBC였어요. 공공재에 대한 투자가 한류 상품의 대박으로 이어졌고, 이는 국가 위상의 제고로 이어졌어요. 

영국에 와서 좋은 걸 많이 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자부심이 있어요. 누구나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공중파 드라마를 연출한다는 것. 공짜로 즐길 수 있는 세상이라 행복하다고요. 국제적 기준으로 보아서도 부끄럽지 않은 드라마 연출가가 되도록 더욱 노력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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