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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세계여행

여권없는 여행광

by 김민식pd 2018. 11. 20.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저는 여권이 없어요. 아니 여권이 안 나옵니다. 몇 년 전, 여권이 만료가 되어 구청에 갔는데요. 별 생각 없이 새로 찍은 사진을 붙이고 인지세를 냈습니다. 잠시 후 직원이 부르더군요. 그때 분위기가 좀 이상했어요.

“여권 발급 신청을 했는데 경찰 신원조회에서 걸리시네요?” “네?” 

무슨 현상수배범이나 전과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 직원분도 좀 놀랐을 것 같아요. 신원조회에 걸리는 걸 보니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잖아요. 얼마나 겁이 나겠어요. 아, 정말 얼굴이 빨개지고 부끄러워 혼났어요. 2012년 MBC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할 때 검찰이 저를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징역 2년형을 구형했지만, 1심 국민참여재판에서 무죄가 나왔고, 2심 고등법원 항소심도 무죄가 나왔는데 검찰이 또 항소해서 현재 대법원에 사건이 계류중입니다. 아직 법률적 판단이 나지 않았기에 나라에서 보기엔 죄를 짓고 국외 도피할 우려가 있는 사람인 거죠. 그러니 새로 여권을 발급받을 수 없어요. 완전 좌절했습니다. 아니, 여행 다니는 게 삶의 가장 큰 낙인데 여권이 없다는 게 말이 되나?

1992년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이후, 저는 매년 한번 씩 해외여행을 다녔는데, 올해는 여권이 없어 불가능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지난 2월에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진행한 영국 포맷 연수 출장을 가게 되었어요. BBC에서 만든 ‘루터’라는 드라마의 판권을 MBC에서 사서 <나쁜 형사>를 제작하고 있어요. 영국과 드라마 제작 교류를 위해 동시통역사 출신에 드라마 피디인 제게 포맷 연수 출장을 다녀오라고 했어요. 대법원에 연락을 해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그제야 1년짜리 여권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런던에 다녀왔어요. 

지난 8월에 드라마 <이별이 떠났다>가 끝났어요. 드라마를 하는 동안에는 몸도 힘들지만 마음고생도 꽤 합니다. 방송이 끝나면 휴가를 떠나 마음을 비우는데요. 항공권을 구매했더니, 여권에 남은 기한이 6개월이 안 되어 출국할 수 없다고 나왔어요. 결국 항공권 예약도 취소했지요. 만나는 사람들은 휴가는 어디로 가냐고 묻는데, 나는 죄인의 몸이라 여권이 안 나온다는 말을 하기는 참 부끄럽더군요. 그래서 조용히 국내에서 지냈어요. 추석 연휴에 자전거 전국일주를 간 것도 그래서입니다. 어차피 해외여행을 못 간다면, 국내 여행이라도 다니자, 벼르고 별렀던 자전거 전국일주를 간 거지요.

그런데요, 인생이 참 재미있습니다. 죽으란 법은 없어요. 예능 프로그램 <토크 노마드>에서 출연제의가 왔어요. 서울 남산 편에 출연했는데, 담당 피디가 다시 연락을 했어요. 영국 런던으로 가는데 로맨틱 코미디 전문 피디로서 영국의 로맨스 영화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요. 바로 구청에 여권을 신청하고 경찰서 신원조회 팀에 연락했어요. MBC 직원인데 예능 프로그램 해외 촬영 때문에 영국 출장을 가야 하니 여권을 발급해달라고요. 공식적 사유가 있으니 여권이 나오더군요. 그런데요, 이번엔 단수 여권이 나왔어요. 딱 1번 출국한 후 바로 용도폐기 되는 여권이죠. 범죄자들 전용 여권인가 봐요.  

해외여행을 갈 땐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쇼핑으로 달래고자 항상 면세점에 가서 화장품이나 필요한 물건을 선물합니다. 계산대 직원이 여권을 보고 물었어요. “S로 시작하는 여권 번호는 처음 봐요. 이게 단수 여권인가요?” “그동안 일하면서 착한 사람들만 만나셨나 봐요. 범죄자들은 출국 제한 조치로서 복수 여권 발행이 안 되거든요.” 라는 농담을 던지려다 참았어요. 놀라실까 봐서요. 그냥 씩 웃으며 나왔지요. 

영국 공항에서 출입국 관리소 직원도 저를 미심쩍게 보더군요. 여권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얇은 여권은 처음인데? 왜 그렇지?’ 혹시 제가 출입국 관리 대상인 테러리스트인가 싶어 물어보나 봐요. 단수여권은 왠지 수상쩍어 보이는 거죠. 그냥 씩 웃으면서 나올 일이 많지 않아서 그렇다고 눙쳤어요. 

검찰에서 기소한 게 2012년의 일인데 2018년이 다 가도록 아직도 대법원의 판단은 나지 않았어요.  


토크 노마드 출연 덕분에 영국 출장을 가게 되었고요. 간 김에 휴가도 붙여 쉬다 왔어요. 

그래서........   

곧 2018 런던 여행기가 이어집니다. 개봉박두! 


다시 찾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지난 금요일에 방송된 <토크 노마드> 스크린샷입니다. 사진 제공해주신 상섭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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