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짜 PD 스쿨/매일 아침 써봤니?

96년에 쓴 역자후기

by 김민식pd 2018. 2. 21.

대학 시절, 저는 SF의 그랜드 마스터, 아이작 아시모프를 좋아했는데요. 평생 500권의 책을 낸 작가이다보니, 원서를 다루는 헌책방에 가면 꼭 그의 책이 한 두권은 있었거든요.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그의 책은 손에 잡히는대로 모조리 찾아서 읽습니다. 캐나다 여행 갔다가 <Robot Vision>이라는 소설을 사왔는데요. 한국에는 번역된 적이 없는 작품이었어요.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이렇게 재미있는 걸, 나혼자 알고 말기에는 아깝더라고요. 실력은 부족하지만 내가 한번 번역해보자 싶어서, 나우누리 SF 동호회에 조금씩 번역해서 올렸어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잠들기 전 한 두 시간 시간을 내어 번역했어요. 90년대엔 저작권 개념이 약했던 시절이라 그런 일도 가능했지요. 그 원고를 모아 출판도 했어요.

직업이 MBC 피디니까, 할 얘기도 많고, 그래서 블로그를 하는 게 아닌가,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쥐뿔도 없는 20대에도 이렇게 살았어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누가 돈을 주거나 말거나 돈 한 푼 안 받고도 그냥 했습니다. 번역이 그랬어요. 나우누리 SF 동호회에 소설을 번역해서 올렸어요. 그 원고가 쌓이니까 어느 순간, 책이 되더군요. 

재미를 좇다보면, 어느 순간 돈이 따라옵니다. 그게 제가 사는 방식입니다. 92년에 입사한 첫 직장을 그만 둘 때도 생각은 같았어요. 돈은 많이 받지만, 일이 재미가 없다면, 그 일을 평생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오늘은 1996년에 쓴 역자 후기를 올립니다. 20대의 김민식이 어떤 생각으로 살았는지 나이 50에 뒤돌아보며 다시 삶의 태도를 가다듬습니다.




'나의 꿈, 아시모프


아시모프와의 만남은 대학 4학년 때, 어느 헌책방에서 이루어졌다. 우연히 <The Best Science Fiction of Isaac Asimov>라는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의 과학 칼럼집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 주저없이 집어들었다. 며칠 동안 영한사전을 뒤적이며 시공을 초월한 다양한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후 <Robot Vision>과 <나는 로봇 I, Robot> 등을 읽었고 그 작품에 대한 감동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내 손으로 아시모프의 작품을 번역해 보리라 마음먹게 만들었다. 졸업과 동시에 시작한 직장 생활에서도 영문소설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고 그런 나를 보며 입사동기들은 아직 영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고 걱정하곤 했다. 결국 1년 반 만에 사표를 내고 통역대학원에서 좋아하는 어학 공부를 마음껏 하게 되었다. (공부를 마음껏 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거의 질리도록 한다고 해야 정확하다.)

입학 후 늘 생각해 오던 아시모프 단편선을 놓고 곰곰이 궁리해 보았다. 솔직히 번역을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먼저 컴퓨터 통신에 미숙하나마 번역물을 띄우게 되었다. 

처음 얼마 동안을 제외하고는 조금씩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지만 통신 독자들에 대한 의무감에서 꾸준히 작업을 하게 되었고 드디어 아시모프 작품집 출간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중략)

원래 통역대학원 졸업 논문으로 준비하던 아시모프 단편 번역선을 예정보다 일찍 내놓게 되었다. 어린 시절 최고의 낙은 책읽기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번역을 하면서 그 동안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번역자분들에게 진 빚을 약간이나마 갚는 기분이다. 또한 책이 출판될 수 있도록 도와준 박상준 선배와 한뜻 출판사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무엇 하나 혼자 힘으로 되는 법이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언제나 나를 격려해 주시는 어머니, 그리고 항상 나를 믿어주는 동생 미리, 이 두 사람에게 가장 큰 빚을 지고 산다. 

20대의 김민식은 저렇게 믿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이 큰 행복이라고. 나이 50에 김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로그하는 재미를 발견한 건, 어쩌면 20대에 첫 직장을 때려치고 나와 나우누리 통신에 소설을 번역해 올리던 김민식의 삶이 이어진 결과일지도 몰라요. 온라인 독자 여러분 덕에 글쓰는 재미를 누립니다. 고맙습니다!   



 

반응형

'공짜 PD 스쿨 > 매일 아침 써봤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용과 일의 차이  (8) 2018.08.08
짠돌이의 럭셔리한 인터뷰  (15) 2018.04.27
답을 모를 땐, 뭐라도 쓴다  (13) 2018.02.19
'책 이게 뭐라고'에 나왔어요  (19) 2018.02.14
야무 님의 리뷰  (23) 2018.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