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저는 SF의 그랜드 마스터, 아이작 아시모프를 좋아했는데요. 평생 500권의 책을 낸 작가이다보니, 원서를 다루는 헌책방에 가면 꼭 그의 책이 한 두권은 있었거든요.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그의 책은 손에 잡히는대로 모조리 찾아서 읽습니다. 캐나다 여행 갔다가 <Robot Vision>이라는 소설을 사왔는데요. 한국에는 번역된 적이 없는 작품이었어요. 읽어보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이렇게 재미있는 걸, 나혼자 알고 말기에는 아깝더라고요. 실력은 부족하지만 내가 한번 번역해보자 싶어서, 나우누리 SF 동호회에 조금씩 번역해서 올렸어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잠들기 전 한 두 시간 시간을 내어 번역했어요. 90년대엔 저작권 개념이 약했던 시절이라 그런 일도 가능했지요. 그 원고를 모아 출판도 했어요.

직업이 MBC 피디니까, 할 얘기도 많고, 그래서 블로그를 하는 게 아닌가,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쥐뿔도 없는 20대에도 이렇게 살았어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누가 돈을 주거나 말거나 돈 한 푼 안 받고도 그냥 했습니다. 번역이 그랬어요. 나우누리 SF 동호회에 소설을 번역해서 올렸어요. 그 원고가 쌓이니까 어느 순간, 책이 되더군요. 

재미를 좇다보면, 어느 순간 돈이 따라옵니다. 그게 제가 사는 방식입니다. 92년에 입사한 첫 직장을 그만 둘 때도 생각은 같았어요. 돈은 많이 받지만, 일이 재미가 없다면, 그 일을 평생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오늘은 1996년에 쓴 역자 후기를 올립니다. 20대의 김민식이 어떤 생각으로 살았는지 나이 50에 뒤돌아보며 다시 삶의 태도를 가다듬습니다.




'나의 꿈, 아시모프


아시모프와의 만남은 대학 4학년 때, 어느 헌책방에서 이루어졌다. 우연히 <The Best Science Fiction of Isaac Asimov>라는 책을 보게 되었는데, 그의 과학 칼럼집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 주저없이 집어들었다. 며칠 동안 영한사전을 뒤적이며 시공을 초월한 다양한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후 <Robot Vision>과 <나는 로봇 I, Robot> 등을 읽었고 그 작품에 대한 감동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내 손으로 아시모프의 작품을 번역해 보리라 마음먹게 만들었다. 졸업과 동시에 시작한 직장 생활에서도 영문소설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고 그런 나를 보며 입사동기들은 아직 영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고 걱정하곤 했다. 결국 1년 반 만에 사표를 내고 통역대학원에서 좋아하는 어학 공부를 마음껏 하게 되었다. (공부를 마음껏 한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거의 질리도록 한다고 해야 정확하다.)

입학 후 늘 생각해 오던 아시모프 단편선을 놓고 곰곰이 궁리해 보았다. 솔직히 번역을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먼저 컴퓨터 통신에 미숙하나마 번역물을 띄우게 되었다. 

처음 얼마 동안을 제외하고는 조금씩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지만 통신 독자들에 대한 의무감에서 꾸준히 작업을 하게 되었고 드디어 아시모프 작품집 출간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중략)

원래 통역대학원 졸업 논문으로 준비하던 아시모프 단편 번역선을 예정보다 일찍 내놓게 되었다. 어린 시절 최고의 낙은 책읽기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번역을 하면서 그 동안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번역자분들에게 진 빚을 약간이나마 갚는 기분이다. 또한 책이 출판될 수 있도록 도와준 박상준 선배와 한뜻 출판사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무엇 하나 혼자 힘으로 되는 법이 없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언제나 나를 격려해 주시는 어머니, 그리고 항상 나를 믿어주는 동생 미리, 이 두 사람에게 가장 큰 빚을 지고 산다. 

20대의 김민식은 저렇게 믿었어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이 큰 행복이라고. 나이 50에 김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로그하는 재미를 발견한 건, 어쩌면 20대에 첫 직장을 때려치고 나와 나우누리 통신에 소설을 번역해 올리던 김민식의 삶이 이어진 결과일지도 몰라요. 온라인 독자 여러분 덕에 글쓰는 재미를 누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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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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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yanluna 2018.02.21 07:2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의 이십대를 보낸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ㅠㅠ 30대라도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어요.

  2. 섭섭이짱 2018.02.21 0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역자후기만 봐도 96년 PD님 모습이 그려지네요..
    번역가에서 책 저자로 ... PC통신에서 블로그로..
    좋아하는걸 꾸준히 하는게 중요하다는걸 다시 느낍니다. ^^

    20년후에도 블로그에 매일 글쓰시고, 왕성한 저자로 활동하실 모습이 기대됩니다. 그때도 이 글을 보시며 또 흐뭇해하실것 같네요. ^^

  3. 둥파네 2018.02.21 09: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생의 황금기라고 하는 20대 대학시절을 그렇게 보내셨군요.
    팟캐스트에서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잃어야 한다'라고 하신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pd님은 남들이 저녁에 친구들과 만나서 술마시거나 아니면 집에서 TV 드라마를 볼 때
    아시모프의 영문소설을 읽으면서 조금씩이라도 번역하여 통신망에 올리셨군요.
    그 꾸준함이 결실을 맺어 후에 단편집도 출판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에게는 이 글이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좋아하는 무언가를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은 포기해야 한다'라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4. 두리 2018.02.21 09: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살면서 그걸 느낍니다. 꾸준히 하자. 버티자.봐주는이 없어도 내가 좋아하니까....
    덕분에 1,2주에 한번씩 올렸던 블로그 글을 일주일에 다섯번씩 올리고 책도 틈틈이 계속 읽고있어요. 제가 좋아하는 일이거든요.

  5. 아리아리짱 2018.02.21 09: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pd님 아리아리!
    PD님 20대의 삶도 범상치 않으셨네요!

    드디어 베일이 벗어젔어요!
    '이별이 떠났다.' 소재원 원작. 김민식 pd 연출이 드디어 5월에 mbc주말 드라마로 만나게 된다는경향신문 기사 봤어요. 정말 기대 됩니다.
    늘 응원 합니다!

  6. 노이빗 2018.02.21 10:0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운이 완전히 다운되어 오늘 하루를 어찌 버티나..하면서 들어와 피디님 글을 읽으면 또 뭔지 모를 에너지가 충전 됩니다. 그래.. '돈' 말고 '재미' 를 쫓으면 되...재밌는걸 찾아보자.그리 생각하며.하다보면 아이디어 혹은 영감이 무심한듯 툭..다가오더라구요. 저는 천리안에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시작은 '벙개' 혹은 '정모' 의 후기였고 "와! 니 후기 생생하다.캡이다.' 이런 댓글에 '어머나..' 하면서 후루룩 써서 올렸던 글들이 피씨통신상의 저의 정체성이 되더라구요. 그 시작은 초등학교 2학년 부터 매일 써야 했던 일기장이었던거 같습니다. 이번 명절 동안 시댁에서 접하는 '가부장제' 의 현상들을 접하는 마음의 변화, 반감 그리고 연로하신 어른들을 바라보는 애틋함 등, 감정의 변화와 의식의 흐름 정리해 자주 가는 운동 동호회 온라인까페에 올렸습니다. 남녀노소가 다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다양한 댓글이 달리고 토론이 되면서 그 글에 '반성' 을 한다는 가부장님들까지..^^ 명절 속 매우 즐거운 나만의 즐거움 이었답니다. 그런 것들을 모아서 저도 조만간 티스토리에 블로그를 오픈해 볼까 합니다. 긍정적인 자극...늘! 감사합니다.

  7. 슈프리모701 2018.02.23 18: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자신이 하고 싶을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은 큰 행복이다...
    지금 직장 다니는 세 아들의 엄마인데~... 아들과 남편 그리고 무엇보다 20대에 행복함이 무엇인지 정의 내려두고 조금씩 하고 있는 3가지 일들을 꾸준히... 피디님처럼 나눠서 저도.. 행복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될래요.
    그 일을 하면서 과연 이 일이 경제적으로 나를 보장해줄랑가~하는 의구심이 들때가 종종 있었지만....이 글을 읽으며... 돈은 정년보장된 직장을 통해 얻고~ 행복감과 행복함을 나누는 일로 계속 가져가야겠다 확신했어요.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이 글을 읽고 확신갖고 나눔하여 성장하였노라 인사드리는 상상을 미리 해 봅니다.
    로켓추진장치를 장착받은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글을 읽을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그건~ 대학시절의 저의 생각들과 끄적임들이 오버랩되어 그런듯 합니다.

  8. SORA& 2018.03.05 16: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낯익은 숫자네요..1996년
    첫결혼(아직까지는ㅋ), 첫임신, 그리고 퇴사...출판사가 저의 첫 신혼집 주소랑 가까워 놀랐습니다 ^^
    글을 쓰는 어려움보다 누군가에게 보여진다는 두려움이 더 큰 것 같네요..아직 저에겐~
    뒤를 돌아보지 말라던 친구말을 항상 새기며 살았는데 그보다 더 뒤를 보며 행복했던 때를 생각해봐야겠습니다..

  9. 그린하트 2018.05.29 08:5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작아시모프.. 반가운 마음에 글 남깁니다.^^ 저는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학교 도서관에서 처음 접했는데요, 현대정보문화사에서 나온 로봇 시리즈와 파운데이션 시리즈를 다 읽었죠.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못하지만 로봇이 지켜야 할 3대 원칙과 그 두 시리즈의 접점에 이른 순간의 전율을 지금도 잊지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