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 때 일입니다. 국사 시험 마지막 문제는 주관식이었어요. 

‘최치원의 사산비 중 하나의 이름과 그 소재지를 쓰시오.’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글을 지은 비문이 전국에 4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쓰라는 문제였습니다. 최치원이 쓴 네 개의 비문(碑文), 사산 비명(四山 碑銘)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산(山)이란 선종을 뜻하는데, 결국 사산 비문이란 선종 승려 및 사찰에 관한 비문입니다.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대숭복사비,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중 하나를 쓰라는 거지요. 국사 시간에 배우긴 했는데 막상 쓰라고 하니,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어요. ‘다음 4개 보기 중 사산비가 아닌 것을 찾으시오.’ 라는 객관식 문제라면 찍기라도 할 텐데, 하필 주관식이었어요. 잔인한 역사 선생님! 답지에 빈 칸을 남기기는 싫어 머리를 쥐어뜯다 최선을 다해 답을 적어냈습니다.

일주일 후 국사 시간, 엄숙한 표정 탓에 상영 대사라는 별명을 가진 이상영 국사 선생님이 교실에 오셨어요. 웬일인지 그날따라 표정이 더 무섭더군요. 선생님은 채점한 답지를 들추며 몇몇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셨어요. 네 명의 학생들이 나오자 칠판에 손을 짚고 엎드리게 하여 줄빠따를 놓으셨습니다. “뭐? 상영대사 송덕비? 무학산 소재?” 선생님의 별명으로 발칙한 비명을 만든 아이들의 비명이 학교 뒷산인 무학산에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감히 선생님의 존함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맞아도 싸지........’

“너희들은 이제 들어가.” 선생님은 다시 답안지를 뒤적이셨습니다. 약간 불안해졌어요. “35번, 김민식, 앞으로 나와!” 쭈뼛쭈뼛 나갔더니 선생님이 코앞에 내 답안지를 들이미셨다. 

“뭐? 에베레스트 산에 뭐가 있어? 민식 대왕이 어쩌고 어째?” 

그래요, 저는 채점에 지치신 선생님께 작은 웃음을 선사하고자 이렇게 적었습니다. 

‘민식 대왕 세계정복 기념비, 에베레스트 산 소재.’ 

저의 기획 의도는 실패였나 봐요. 답안은 웃음보다 분노를 불러일으켰는지, 수업 끝나고 교무실에 불려가 오래도록 매를 맞았어요. 당시의 일은 ‘상영대사와 민식 대왕의 교무실 대첩’이란 이름으로 회자되었지요.


매일 아침 블로그에 글을 씁니다. 인생이 내게 던진 질문에 어떻게든 답을 하려고 해요. '영어를 잘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이를 잘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창의성을 키우려면 뭘해야 할까?' '정년 퇴직 후에도 일을 하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질문을 놓고 나름의 답을 올리지만, 때로는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땐, 고교 2학년 시절, 주관식 문제를 앞에둔 김민식을 생각합니다.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나만의 답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정답이 아닐 수도 있고, 무리수를 던져 선생님께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지요. 하지만 만약 선생님이 지금 제가 코미디 피디로 일하고 있고, 책을 쓰는 저자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러지 않으실까요? '그래, 그 녀석은 어린 시절부터 끼가 있었어.' 

뭐, 당시엔 싹수가 노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셨겠지만요. 


민식대왕 세계정복 기념비...

ㅋㅋㅋㅋㅋ


무슨 생각으로 그런 답을 썼는지 참... 

그래도 어때요? 덕분에 재미난 추억을 하나 남겼고, 이렇게 블로그 글감도 하나 건졌으니, 그걸로 된 거죠.

 

인생이 내게 질문을 던질 때, 

답지에 빈칸은 남겨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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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단실 2018.02.19 07: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와~ 일등!
    민식pd님의 글 눈팅하다가,
    아직 아무도 댓글 안 달아서 기념으로 달아봅니다.

    제목만 보고 예상한 내용과 조-오금 다르네요. ^^;;;
    피디님 따라 매일 블로그에 글 올리는 훈련중인 따라쟁이입니다.
    이른 아침 하나 올리고, 영어외우다 머리가 안 돌아가서
    물 한잔 마시며, 피디님은 이미 올리셨겠지?? 하며 와보니,
    역시 올리셨군요!! 명절은 잘 보내셨는지요.. ^^

    제 블로그엔 뭘 쓸 수 있을까 저도 그 답을 찾아 가는 중입니다.
    그러면서 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네요.
    부정의 아이콘이랍니다, 특히 나자신에 대해.
    그런데 블로그에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내가 뭘 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니,
    내가 잘 하는 것을 억지로(?)라도 생각하게 되면서,
    마음이 조금씩 밝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아직 3주차라 착각일 수도 있지만요.

    부끄럼쟁이라 비밀글 체크할까 하다가,
    용기내어 그냥 써봅니다.
    오늘도 재미있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2. 섭섭이짱 2018.02.19 08:0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민식대왕 세계정복 기념비' ㅋㅋㅋ 어릴때부터 개그하고 싶은 욕심이 있으셨네요. 지금이라면 SNS 에서 우낀 시험지 답안으로 유명해졌을거 같은데... ^^ 지금쯤 그 국사 선생님은 PD님을 자랑스러워 하실거 같아요. 내가 가르친 학생이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학창시절에 조용히 지내서 그런지 선생님들과의 기억이 없는데...오늘 글을 읽다보니 예전 추억이 몇 가지 떠오르네요. 요즘 글이 잘 안 써져서 미발행 글이 많았는데 오늘 글을 보면서 글쓰기할 용기도 생기고, 블로그 글감도 얻고 갑니다. ^^

    이번주도 즐거운 한주 되세요. ^^

  3. 2018.02.19 08:5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마산청보리 2018.02.19 09: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습니다. 얼마 전 피디님의 새 책을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어요. 서평 준비 중입니다. 블로그 글을 읽고 있으니 책 내용이 다시 떠오르는군요.^^ 편안한 문체가 좋습니다.

  5. 아리아리짱 2018.02.19 10:2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pd님 아리아리!
    PD님 한동안 궤도 이탈한 우주선 처럼 삶의 좌표를 놓친듯 헤맸습니다. 갱년기 증세라 하기엔 버거운 물살들...
    블로그 매일 글쓰기가 얼마나 힘든지, 하루하루 일상이 비범함이 되는게 정말어렵다는 것을 실감중입니다. 그래도 100명중 3명이 성공한다는 영어책 한권 외우기 93일차 진행중이고 앞에부분은 조금 가물가물 하지만 또 복습하죠 뭐"그까이꺼"
    '답이 떠오르지 않을때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나만의 답을 하려고 합니다. 정답이 아닐수도, 무리수일 수도 있지만, 인생이 내게 질문을 던질때 답지에 빈칸은 남겨두지 않으려 합니다.'

    역시 pd님은 저의 "serendipity"
    다시 힘내어 keep on going!

  6. 로미르미 2018.02.19 20: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맞아요. 정답을 모를땐 뭐라도 써야죠. 빈칸을 남기는건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까요.

    피디님의 신간 <매일 아침 써봤니?> 책을 읽었어요.
    그리고 오늘 용기내어 몇몇 블로거님께 초대장을 부탁드렸고,
    감사하게도 한 분이 흔쾌히 초대장을 보내주신 덕분에
    티스토리를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저는 곧 출산을 앞둔 임산부에요.(출산 예정일까지 13일 남았답니다)
    결혼하고 3년차에 아가를 가지게 되었고 기다리던 2세 소식은 남편에게도 제게도 행복 그 자체였어요.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임신 중기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어요.
    버티기엔 멘탈이 약했고 그것이 무리가 되어 아이를 잃을까 염려되다보니 포기아닌 포기를 한거죠.
    열심히 일했던 직장을 허무하게 잃고나니 모든것이 다 상처가 되었어요. 대학졸업하고 열심히 취업준비하던 나의 20대 중반, 딸 뒷바라지 열심히 하던 엄마, 경제적 부담을 홀로 짊어지게 된 남편.
    나 자신에게도 가족들에게도 미안해지고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자신감이 없어지더라구요.

    어릴적 소설가를 꿈꿨었어요. 그래서 가끔 혼자 단편소설이랍시고 노트북에 글을 써두곤 했지요.
    그걸 잘 아는 남편이 제게 다이어리 하나를 건네주며
    "르미는 글쓰는거 좋아하니까 여기에 다 적어." 라고 하더군요.
    제가 억울해하는게 참 안쓰러웠는지 다이어리에다 하소연하라는 의미였어요.

    매일 일기를 쓰기 시작했더니 조금씩 내 안의 화가 씻기더라구요.
    그러고 나니 내 취미인 독서와 앞으로 치르게 될 육아전쟁을 기록하고
    누군가와 공유하며 위로 받고 위로를 건네고 싶어지더군요.
    작년 연말부터 블로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무엇을 적어나가야 할지 잘 모르겠고 용기가 나질 않았어요.

    그러다가 피디님의 책을 읽게 된 거에요.
    구입한 날,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어요. 유난히 마음에 들던 부분은 몇 번 다시 읽었어요.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일단 시작해보자, 마음 먹고나니 무서울게 없었어요.

    초대장이 필요한 티스토리에 가입하려고 블로거들의 포스팅을 기웃대며 초대장 배포한다는 블로그 글에 줄을 서봤지만 당첨운이 없어 실패하길 몇 번.
    이대론 안되겠다 싶어 직접 블로거 몇 분에게 조심스럽게 초대장을 부탁드렸더니 이렇게 감사하게도 초대해주시더라구요.

    차치하고. 이렇게 긴 댓글을 남기는건
    정말 고맙다는 인사 드리고 싶어서에요.
    피디님이 주신 용기를 잘 쥐고 천천히 꾸준히 나아갈게요.

    답을 모르는 인생이기에, 빈 칸으로 남기기 보다는.
    무엇이든 적어나갈게요. 고맙습니다:)

  7. cyanluna 2018.02.20 08: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일단 뭐라도 쓰고 보는데 ㅋㅋ 물리 시험같은 경우 수식을 유도할때 뭘써야할지 아예 난감할때도 많아요 ㅠㅠ

  8. 정지영 2018.02.20 08: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기발한 아이디어!
    나보다 체점하며 피곤하실 선생님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돋보입니다.^^
    센쓰 충만한 학생이었네요.
    학창 시절에 맞은 일이 지금에 와서 요렇게 재미난 이야기거리가 될줄은 몰랐겠죠. 저도 아이에게 가끔씩 중고등 시절 맞은 얘기 해주거든요. 초집중하며 듣는 아이보면 그렇게 재미있나? 싶은데.
    오늘 스토리 보니까 정말 그러네요.
    저도 초집중하며 읽고 완전 재밌었다는 후기 남깁니다. 영국은 잘 다녀오셨는지요~~^^
    기회되면 그 후기도 함 올려주세요.

  9. 아리엘 2018.02.26 09: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PD님의 책을 보고 블로그 글쓰기를 시작했어요.
    어린 시절 책읽고 글쓰는게 좋아서 언젠가는 꼭 작가가 될 거라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있었었는데
    책을 읽고 지금 바로 작가가 되어보자 실행에 옮기게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10. 온유네 2018.09.04 2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늘 #매일 아침 써봤니? 를 다 읽었습니다.
    자극이 되네요....집에서 육아만 하다보니 급변하는 세상 못따라가는거 이해 하시죠~?
    좋은 글로 또 만나주세요....
    제 삶을 어떻게 재밌게 꾸려 나가야할지 고민이 생기네요....감사해요~~~^^

  11. nira000100 2018.11.18 07: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나는 내 남편을 어떻게 되찾았는지에 대한 훌륭한 증언을 나누고 싶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온라인으로 주문형 캐스터가 있고 강력하고 진품임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의 이름은 바바 웨일 와이즈먼이다. 그는 도움을 주었다. 나에게 버렸던 남편과 나의 관계를 재결합 시키려고 최근에 와서 내가 Wiseman에게 연락했을 때 그는 나를 위해 사랑의 주문을 던졌다. 그리고 나에게 어떤 도움도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남편은 나에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이 기사를 읽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Wiseman은 결혼과 관계의 재결합, 질병의 모든 유형의 치료, 법원 사건, 임신 주문과 같은 모든 유형의 도움을 제공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Wiseman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필요로하는지 깨닫게합니다. 이 남자는 실재를위한 것입니다. 또한 당신의 단절된 관계를 고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남편이 돌아왔다! 그것은 기적과 같았다! 결혼 상담은 없으며 우리의 사랑의 삶에서 아주 잘하고 있습니다. 지속적인 해결책에 문제가 있다면이 위대한 사람에게 연락하십시오.
    이메일 : babawalewiseman01@gmail.com
    WhatsApp : +2348129806153

  12. 은하수 2019.01.26 10:2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내가 선생님이었다면...어떻게 했을까
    30년전 학교분위기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을 듯 해요ㅎㅎ
    틀릴까봐,맞는거 아니면 안한다는 그런 마음이
    시도조차 안하게 만드는건 아닌가 생각하게 해요
    매를 부르는 용기 어쨌든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