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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우리 곁의 여성차별

by 김민식pd 2016. 7. 11.

2016-160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 문학과 지성사)

 

'사람, 장소, 환대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

이 책의 키워드는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이다. 이 세 개념은 맞물려서 서로를 지탱한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점이다.'

(책 뒷표지에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책에서 한국 여성은 아직 제대로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자가 차를 몰고 도로에 나오면 '김여사'가 되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면 '김치녀'가 되고, 아기를 데리고 공공장소에 나가면 '맘충'이 되니까요. 여성 혐오와 관련한 단어들은 여성들이 환대받지 못하는 장소에 대한 비유지요. 처음에 저는 여성혐오에 대한 작가의 이야기가 조금 지나치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다 아래 대목에 이르렀지요.

 

'리차드 세넷은 신자유주의가 노동자들에게 지나치게 이동성을 강요함으로써 생겨나는 정신적인 고통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노동자에게 전근 발령은 그동안 정들었던 이웃과 헤어지고 낯선 곳에서 삶을 새로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용자들은 노동자가 겪는 상실감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쉽게 이러한 결정을 내린다. (중략) 한 장소를 떠나는 것은 그 장소에 속한 다른 모든 사람들을 떠나는 것이며, 우리의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 뿐 아니라 우리를 기억하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의 책 286쪽) 

MBC 파업이 끝난 후, 기자와 피디, 그리고 아나운서들은 자신이 수십년간 일해온 장소에서 쫓겨납니다. 광화문, 구로 공단, 수원 총국, 심지어 용인 드라마 세트장으로까지 뿔뿔이 흩어져요. 현업에서 내쫓긴 MBC 조합원들을 생각하면, 이 글에서 말한 고통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느끼는 고통이란, 자신의 경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50년을 산 제가 여자로 살면서 느끼는 고통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지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강남역 10번 출구에 모인 이들에게 '그냥 단순한 살인 사건인데 뭘 그렇게까지 반응해?' 라고 말할 수 없어요.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할 때, 상대방은 그것을 모욕이라고 느낍니다.

 

'나는 여성의 지위 향상을 너무 과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공한 여성과 성공하지 못한 여성의 차이는 성공한 흑인과 성공하지 못한 흑인의 차이와 비슷하다. 그들은 결국 여성이며, 흑인인 것이다. 성폭행 당하는 여성의 수가 백인우월주의자에게 습격당하는 흑인의 수보다 더 많다는 점에서, 여성은 흑인보다 못한 처지라고 할 수도 있다. KKK단의 린치가 인간의 공격 본능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처럼, 성폭행은 남성의 성욕으로 설명될 수 없다. 성폭행은 남성 지배 사회가 조장하고 묵인하는 일종의 의례이며, 린치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에게 '교훈'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환대는 여전히 조건적이다. 여성은 어디서나 모욕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으며, 멋진 옷과 가방도, 자격증도, 명패와 직함도 완전한 보호막이 되어주지 못한다. 여성은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이등 시민이다. 흑인 변호사나 흑인 교수 심지어 흑인 대통령의 존재가 전체 흑인의 지위를 판단하는 데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듯이, 몇몇 성공한 여성이 있다고 해서 이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성은 자리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 환대의 권리-환대받을 권리와 환대할 권리-는 그러므로 당분간 우리의 어젠다를 구성할 것이다.'

(위의 책 294쪽)

어떤 문제를 장소로 몰아가면 안 됩니다. 섬 마을 교사 사건이 있자, 그럼 여자 교사는 섬에 발령을 내지 않겠다거나, 강남역 사건이 있자 남녀공용 화장실에 여자가 가지 말라고 하는 건, 장소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 양성 평등은 이미 이루어졌다고, 아니 심지어 남성이 차별받는 시대라고 느끼는데요. 아직도 많은 장소에서 한국 여성들이 받는 모욕을 생각하면, 아직 성 평등은 요원한 이야기에요. 이 책은 모욕의 문제를 깊이 파고듭니다. 단순히 내가 약자가 아니라면,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여성이 아니면 모욕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신자유주의적 노동 통제는 신분적 모욕을 새로운 형태의, 더욱 미묘하고 일반화된 모욕으로 대체하였다.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한다든가, 프로페셔널리즘의 이름으로 노예 같은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모욕이 주로 저학력, 여성, 육체노동자의 몫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모든 노동자, 즉 노동자로서 모든 사람이 모욕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비자로서만 의식하려 하며,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은 되도록 잊고 싶어 한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우리는 연대 의식을 느끼는 대신에 소비자로서 겪게 될 불편을 먼저 생각한다.'

(위의 책 158쪽)

 

작가는 학술 논문에도 대중적인 에세이에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새로운 글쓰기 형식을 실험하고 있답니다. 앞으로 더욱 기대되는 작가입니다. 책의 구절구절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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