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나는 성적이 신통치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봤더니 반에서 50명 중 22등, 고교 내신 등급이 15등급 중 7등급이었다. 아버지와 학교에 가서 진학 상담을 받았는데 담임선생님이 그러셨다. “이 성적으로 수도권 대학은 힘듭니다.” 집이 울산이었는데, 아버지는 집 근처에 있는 대학교에 나를 데려가서 교수도 만나고 학교 구경도 시켜주셨다. “집에서 다니면 되니까, 하숙비도 안 들고 좋겠네.”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사느라 우울한 사춘기를 보냈는데, 심지어 대학도 집에서 다녀야하다니. 그길로 나는 독서실을 끊었다.
‘대학은 무조건 서울로 가자. 그래서 집에서 탈출하자.’라고 마음을 먹었지만, 서울에 있는 어떤 대학을 갈지, 전공을 뭐로 할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공부가 잘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평소에 짝사랑하던 하이틴 스타 채시라를 찾았다. 여고생 모델이던 채시라의 웃는 얼굴이 가득한 초콜릿 광고지를 잡지에서 오려내어 독서실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환한 미소로 나를 보고 웃어주는 채시라를 향해 다짐했다. ‘내 비록 경상도 촌놈이지만, 반드시 서울로 대학을 가서 그대를 만나러 가겠소.’
공부하다 졸리거나 지칠 때면 서랍을 열고 채시라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활짝 웃으며 나를 응원하는 모습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계속했다. 가끔 집중력이 떨어질 때엔 채시라를 향한 연애편지도 썼다. ‘나의 마돈나여’ 어쩌고저쩌고 하는 헌정시도 적어서 책상 앞에 붙여놓았다.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을 다잡으면서 굳게 각오를 다졌다. ‘아름다운 그대에게 어울리는 멋진 남자가 되겠소.’
6개월 뒤 학력고사를 보았는데, 284점이 나와서 반에서 2등을 했다. 평소 반에서 중간에서 맴돌던 녀석이 갑자기 2등을 하니 컨닝을 했느니 어쨌느니 말이 많았다. 다 사랑의 힘인데 말이다. 학력고사 점수가 높아 장학생 혜택을 받는 한양대 공대에 지원했는데, 어이없게도 내신 성적이 딸려서 1지망에서 떨어졌다. 그래도 나는 울산 집을 떠난다는 점에 위안을 얻으며 감사한 마음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항상 사람들에게 연애를 하라고 권한다. 연애는 자기계발에 있어 최고의 동기부여라고 말이다. ‘너에게 어울리는 더 멋진 남자가 되겠어.’ 이 한 가지 결심으로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군 생활을 더욱 활기차고 보람 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짝사랑을 진하게 해봐도 좋을 것이다. 그 사랑의 힘으로 자신을 더욱 멋진 남자로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군대에서 나는 통신대 전화 교환수로 일했는데, 전화를 받을 때마다 더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목청을 다듬었다. 비록 밤을 새며 작전본부 상황실에 전화연결해주는 일에 불과했지만, 언젠가 전화로 연인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매력적인 발성법을 연습했다.
생각해보면 군에서 하는 많은 활동이 자기 계발로 이어질 수 있다. 구보나 행군을 할 때는, 예쁜 여자 친구에 어울리는 몸짱이 되겠다는 각오로 뛰어보면 어떨까? 후임병들에게 사람 좋은 고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어 먼 훗날 소개팅을 도모한다는 기분으로 내무반에서 단체 생활을 연습해도 좋을 것이다.
다음에 휴가를 나가면, 평소 좋아하는 그녀를 찾아가 짧은 머리에 수줍은 미소로 인사를 건네 보기 바란다. 더 늦기 전에 연애를 시작하시길.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한 살이라도 어린 나의 모습을 첫인상으로 남겨주는 것이니까.
ps. 대학 입학하고 10년 뒤, MBC PD 공채 시험에 합격한 나는, 용인 민속촌 사극 촬영 현장에서 채시라를 만났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 초콜릿 광고지를 품에 안고 공부했다는 얘기는 차마 하지 못했다. 감독 체면이 있지. ^^
이번달에 나온 월간 '샘터' 7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청춘 멘토링'이라 하여 국군 장병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글로 연재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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