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렇게 철없이 살아도 될까? 그런 고민이 있는 건 사실이다. 최근에 책을 한권 읽었는데, 그 속에서 철없는 어른을 위한 희망을 찾았다. ‘A Long Bright Future - 밝고 긴 미래’에서 저자인 로라 카스텐센 스탠포드 대 교수는 지난 100년 사이 인류의 수명은 30년이 늘었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생활 패턴과 문명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한다.
평균 수명 60세란, 30세 이전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시 커서 자신의 가정을 이루면 부모 세대가 세상을 떠난다는 뜻이다. 즉 ‘이기적 유전자’에서 말했듯이 인간의 삶은 개체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도록 진화했고, 그 결과 인간의 적정 평균 수명은 60세였다. 자신이 가정을 이루기 전까지 부모의 보호 하에서 30년, 자신의 가정을 이룬 후 아이를 돌보는 데 30년. 즉 아이로서 30년, 어른으로 30년 살았던 것이 평균 수명 60세 시대의 삶이다.
그런데 이제 모든 인류는 문명과 기술의 발달 덕에 기대 수명 30년을 보너스로 더 받게 되었다. 아이가 자라 독립한 후, 심지어 일을 그만두고 은퇴한 후에도 30년을 더 사는 것이다. 고령화 사회에 대해 노인 복지 부담이나 노인 의료비 부담, 연금 예산 파탄 등 우려를 표하는 이들도 많은데 과연 이게 우리에게 ‘밝고 긴 미래’란 말인가? 수십 년간 인류의 장수에 대해 연구해온 카스텐센 교수는 30년의 수명 연장은 우리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라 말한다.
물론 그 선물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먼저 기존의 인생 계획, 즉 25세까지 교육, 55세까지 노동, 이후엔 은퇴라는 단조로운 삶의 과정에서 탈피해야 한다. 산업과 기술의 발달이 너무 빨라 앞으로는 10대나 20대에 배운 기술로는 직장에서 30년도 버티기 어렵고, 50에 은퇴하여 40년을 소득 없이 사는 것도 괴로운 일이니 앞으로 인류에게 필요한 자세는 호기심을 잃지 않고 3,40대에도 수시로 배우고, 늙어서도 꾸준히 새로운 재미를 찾아 오래오래 놀듯이 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90년대 초반에 대학을 졸업한 난 운 좋게 취직을 했지만 직장 생활이 갑갑해 1년 반 만에 그만 두고 나왔다. 퇴직금으로 호주 배낭여행을 다녀온 후, 외대 통역대학원에 진학해 다시 학생의 삶을 살았다. 나이 서른에 장난삼아 예능 PD로 MBC에 지원했다가 덜컥 붙은 후, 딴따라 피디로 즐겁게 살았다. 청춘 시트콤 ‘뉴논스톱’으로 연출 데뷔해서 시트콤 피디와 시트콤 마니아의 경계를 오가며 살다, 나이 마흔에 드라마에 미쳐 드라마 피디로 전직했다. 나 자신 드라마 폐인이면서 ‘내조의 여왕’이나 ‘글로리아’같은 드라마를 만들며 나름 폐인 양산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다 2012년 MBC 파업 때는 노조 부위원장으로 선봉에 섰다가 정직 6개월의 중징계를 받기도 했으니 나름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있다. 첫 직장을 그만둘 때나, 나이 마흔에 이직할 때, 40대 중반에 노조에 투신할 때, 주위에서 늘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넌 언제 철들래?”
앞서 말했듯이 난 당분간 철들고 싶은 생각이 없다.
(부천 환타스틱 영화제에 갔다가 풍선껌 불기 이벤트 중~^^)
90세까지 사는 시대다. 서른 살까지는 아이로, 예순 살 이후로 어른으로 산다면 30에서 60사이 이 30년 동안은 ‘아이어른’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내 나이 마흔 여섯, 난 요즘도 새벽에 학원에 나가 대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중국어를 공부하고, 저녁에는 20대 청춘들 틈에서 라틴 댄스를 배우고, 매년 한 번씩 훌쩍 배낭여행을 떠난다. 재작년엔 인도 네팔, 작년엔 라오스, 올해는 스페인, 여행의 즐거움은 한 번도 놓치고 사는 법이 없다. 20대에 가장 즐거운 기억이 배낭여행이었는데, 그 재미난 것을 아저씨가 되었다고 포기하고 살 순 없지 않은가?
나는 정작 대한민국 중년 남자들이 즐기는 술 담배 커피 골프 이런 것들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럼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묻는데, 세상에는 재미난 게 너무 많다. 독서, 여행, 영화 감상 등등. 한때 서른 살에 죽기를 꿈꾼 적도 있지만 요즘 나의 목표는 최대한 오래 사는 것이다. 어린 시절 꿈만 꾼 극장 주인의 삶이 나이 서른에 홈시어터로 가능해졌다. 지금 꿈같은 많은 일들이 30년 내로 다시 현실로 될 것이니 일단 최대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술 담배 커피를 멀리하고 등산과 트레킹으로 체력을 다진다. 죽을 때까지 지속가능한 덕후질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내 꿈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사춘기 고교 시절,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외삼촌이 읽어보라며 권해준 책이 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이라는 제목의 사법고시 합격수기였다. 목숨 걸고 공부해서 사법시험에 패스한 이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가득했는데, 어린 나는 그 책을 읽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천신만고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이야 다시 태어나도 그 길을 가겠다고 하겠지만, 죽도록 고생만 하고 떨어진 사람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까? 20대 청춘은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기인데 그 세월을 희생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면 인생에서 그만한 손해가 또 어디 있는가?
얼마 전 ‘나인 - 아홉 번의 시간여행’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 주인공이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이야기다. 난 그 드라마에 푹 빠져 지내다 문득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과거로 돌아가 내 인생을 바꾼다면 무엇을 바꿔야 할까?’ 한참을 고민해봤는데, 없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스무 살 이후,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는가?’를 물으며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내 나이도, 주위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나만의 즐거움을 추구하며 살았다. 나 자신의 취향에 충실한 삶을 산 결과, SF 번역가에, 시트콤 피디에, 드라마 피디까지 다양한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굳이 그런 직업을 얻지 않았다 해도 SF 소설 마니아에, 시트콤 광팬에, 드라마 폐인으로 사는 순간이 즐거웠다고 자부할 수 있다. 삶은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특정한 결과가 아니라, 그저 매 순간 즐기는 과정이라고 믿기에 난 이제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덕후로 살 수 있어 다행이다.
아이어른(키덜트)으로 살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나이 서른에 죽지 못한 이유' 이후 연재한 글은 여기까지 입니다.
다음주부터는 새로운 연재가 시작됩니다.
'짠돌이 육아 일기' 또 한번 달려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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