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초반에 홈시어터를 하며 집에서 레이저 디스크나 DVD를 보는 사람은 타이틀 구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당시만 해도 국내 출시 DVD도 흔치 않고, 대여점은 전무했으니까. 그래서 다들 미국 아마존에서 온라인 해외 구매를 하거나 해외 출장 가는 길에 타이틀을 사와서 지역 코드를 푼 플레이어로 보는 게 대세였다. 생각해보면 영화 한 편 집에서 보기도 참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난관과 장애가 오히려 ‘덕후’들의 가슴을 더 불타오르게 한 게 아닐까 싶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오히려 흥이 나지 않는다. 왜? 우린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나이니까!
디비디를 쉽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DVD zone’이라는 동호회를 알게 되었다. 일체 가입비나 회비가 없는 무료 동호인 사이트였는데, 운영 방식이 독특했다. DVD 10장을 기탁하면 5장의 타이틀을 무료로 빌릴 수 있었다. 당시 회원이 200여명이었는데 DVD 타이틀 10장만 갖고 있으면 무려 2000장을 빌려 볼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2000년 당시 홈시어터 마니아들에게 꿈같은 동아리였다. ‘소프트웨어 공짜 돌려보기로 하드웨어 업그레이드 비용 마련하자!’는 취지로 결성된 동호회 활동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온라인 동호회를 하다보면 열성분자 몇몇이 도드라지고 그러다보면 그들이 따로 오프라인 모임을 결성하게 된다. 당시 디비디존 사이트에는 타이틀 리뷰 난이 있었다. 수 천 장이나 되는 타이틀 중에 무엇이 볼만하고 새로 나온 DVD 중 구매할 만 한건 뭐가 있는지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게시판이었다. 프로젝터 시연회를 겸한 오프라인 정모에 나갔다가 활발하게 리뷰를 올려 닉네임이 친근한 사람끼리 낯을 익히고 함께 모이고 되었다.
“공사장에 가서 버리는 대리석 조각을 얻어와 서브 우퍼 아래 바닥에 깔았더니 저음이 훨씬 단단해져서 좋더군요.”
“그런 신공이 있군요. 놀랍습니다.”
"저는 아내 몰래 앰프를 하나 새로 샀는데요, 집에 가져가면 쫓겨날까봐 지금 회사 사무실에 두고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스피커랑 아직 연결을 못해서 소리는 못 들었지만, 보기만 해도 흐뭇합니다."
"저런! 그 아까운 전설의 명기를!"
서로 직장, 출신 지역 및 학교가 다른 30대 아저씨들 다섯 명이 모여 ‘누가누가 더 심한 덕후인가’ 배틀을 벌이다 승부를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모임을 결성했다. 이름하여 ‘DVD Mania’ 의의인 즉, '새로 나온 디비디를 공동 구매해서 우리끼리 돌려보자. 소장 가치 있는 DVD가 매달 10장정도 출시되는데 각자 2장씩만 사면 새 영화를 모두 볼 수 있다.'
그 후 우리는 매달 한 번씩 만나 피 터지는 혈전을 벌였다. 공동으로 구입한 10장의 타이틀을 놓고, ‘누가 어떤 영화를 먼저 볼 것인가’ ‘다 보고 난 후, 영구 소장은 누가 할 것인가’를 내기로 결정했다. 해적의 배에다 칼을 꽂거나, 벌린 악어 이빨을 누르거나, 우리의 복불복 게임은 진지하고도 살벌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반지의 제왕’ 완전판을 뽑은 이는 괴성을 지르며 춤을 췄고 다른 이들은 땅을 치며 아쉬워했다. 나이 40줄에 접어든 아저씨들 다섯이서 호프 집 구석에 모여 새 DVD 10장을 쌓아놓고 시끄럽게 노느라 눈총도 좀 받았지만 우린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쩌랴? 우리는 중년의 ‘덕후’들인 것을.
우린 이제 더 이상 DVD를 모으지는 않는다. 벌써 모인지 10년이 넘어, 총각이던 누군가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고, 직장인이던 누군가는 창업해서 대박을 내기도 했다. 멤버 중에는 항공사 파일럿도 있고, 컴퓨터 회사 직원도 있고, 증권사 프로그래머도 있다. 마니아들끼리 모여 모임을 하다 보니 삶의 외연이 넓어진다. 직장이나 학연, 지연 등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사람만 만나면 삶의 경험치가 한정되기 쉽다.
10년 전 어느 날, 중년의 AV 마니아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새로 나온 ‘아이튠즈’라는 음악 관리 프로그램 얘기가 나왔다. 무료 쉐어웨어인데 음악 라이브러리 관리에 탁월하다는 얘기를 누가 했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이튠즈’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작 예능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그게 뭔지 나만 몰랐다.
"애플은 맛이 간 컴퓨터 회사 아니에요?"
스티브 잡스의 재림을 그때 알았다.
만약 그 모임이 아니었다면, 내 인생에 ‘아이튠즈’나 ‘팟캐스트’는 없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내 주위 드라마 피디들 중에는 조연출이 구워주는 시디로 '나는 꼼수다'를 듣는 사람이 있었다.
“야, ‘나꼼수’란 게 인기라는데 그게 뭐냐?”
“아이튠즈로 구독하는 팟캐스트인데요?”
“아,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가서 시디로 구워와 봐.”
이런 식이다.
일반 직장인과 달리 아이어른들은 적극적으로 문화를 즐기고 소비하는 이들이라 항상 기술이나 문화의 유행에 있어 최전선을 달린다. 대중문화 생산자인 PD로 사는 내게, 그들과 함께 놀며 트렌드를 익히는 건 일, 놀이, 공부의 삼위일체다.
온라인 동호회 활동을 하다보면 재미있는 게 늘 눈팅 하는 사람 90%, 댓글 달아 주는 사람 9%, 적극적으로 글 올리는 사람은 1%라는 거다. 난 기왕이면 미친 듯이 빠져서 활동하는 1%가 되고 싶다. 세상을 지배하는 1%는 못 되어도, 무언가 미쳐 사는 1%는 해봐야지.
대학에 진로 특강을 가면 꼭 해주는 얘기. ‘인생, 슬쩍 발만 담그고 살지 마라. 그냥 푹 빠져라. 그래야 남는다. 미친 듯 놀아본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남는다. 경험이든, 사람이든. 둘 중 하나만 남아도 수지맞는 장사다. 돈? 돈은 그 다음에 오는 것이다. 올 수도 있고, 안 올수도 있다. 안와도 그만이라고 마음먹고 사시라. 인생 살면서, 즐겼으면 됐지, 더 바라면 과욕 아닌가?’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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