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살던 경주에는 시내에 극장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가 대왕 극장, 또 하나가 아카데미 극장이었다. 대왕 극장 주인이 우리 동네 살았는데 그 집 아들은 완전 인기 짱이었다. ‘로봇 태권 V’의 새로운 시리즈가 개봉하면 동네 친구들을 끌고 가 공짜로 영화를 보여주곤 했는데, 나는 그 무리에 끼지 못했다. ‘학교 선생 아들로 체면이 있지, 남의 집에 신세지면 안 된다’는 아버지 말씀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맘껏 보는 극장 아들이 부러워 어른이 되면 극장 주인이 되어야지, 결심한 적도 있는데, 만화방이나 전자오락실 주인에 비해 가능성이 떨어져 얼른 포기했다.
그랬던 내가 어른이 되고나니 홈시어터의 보급이 대중화되었다. 이제 가정에서도 프로젝터와 스크린만 있으면 대화면을 구현할 수 있고, 5.1 서라운드 스피커 시스템을 구축하면 극장 부럽지 않은 입체음향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심지어 DVD같은 저장매체의 약진으로 집에 영화 라이브러리를 꾸미는 것도 가능해졌다. 어린 시절에 꿈만 꾸던 것이 어른이 되고 보니 기술과 매체의 발달 덕에 다 가능해진 것이다. 이런 세상을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물론 가정용 홈시어터를 구축하는 작업도 만만하지는 않다. AV 마니아로 살아본 사람은 안다. (여기서 AV는 adult video가 아니라 audio visual의 줄임말이다. 오해하면 큰일 난다.) 프로젝터, 앰프, 스피커, 서브 우퍼 등 모든 하드웨어를 하이엔드로 가자니 가랑이가 찢어지고, 보급형으로 가자니 눈과 귀를 버린다. 결국 나 같은 짠돌이에게 주어진 선택은 가격 대비 성능을 최대한 높이는 길인데 이게 또 쉽지 않다.
예전에는 프로젝터 기술의 한계로 투사거리가 충분하지 않으면 100인치 이상의 대화면을 구현하기 어려웠다. 작은 아파트에 살며 저렴한 프로젝터를 샀더니 투사거리가 짧아 화면도 작고, 머리 바로 위에서 울리는 팬 소음이 심해 영화를 볼 때 불편했다. 유일한 해결책은 더 비싼 기기로 갈아타 소음도 적고 투사거리도 짧은 걸로 업그레이드 하는 길인데, 새 프로젝터 산 지 얼마 되지 않아 업그레이드한다 하면 마님이 노발대발하실 게 뻔하다. 한참을 고민하다 묘수가 떠올라 아내에게 달려갔다.
“부인! 우리 집 거실 벽에 구멍 뚫어도 돼?”
“갑자기 구멍은 왜?”
“안방과 거실 사이에 벽을 뚫고 프로젝터를 안방에 넣잖아? 그럼 거실 벽 스크린까지 거리가 멀어져서 더 큰 화면이 나오거든. 게다가 뚫은 벽에다 유리로 칸막이를 하면 팬 소음을 차폐하는 효과까지 생기지. 안방을 영사실로, 거실을 관객석으로 만드는 거야! 아이디어 죽이지?”
죽이는 아이디어 냈다가 아내에게 맞아 죽을 뻔 했다.
“영화 보겠다고 아파트 벽에 구멍을 뚫어? 네가 제 정신이냐, 인간아!”
결국 그 계획은 포기했다.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나는 소프트웨어 구비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실 아무리 비싼 장비로 홈시어터를 만들어도 볼만한 타이틀이 없으면 결국 빛 좋은 개살구니까.
(다음편에 계속~)
어릴 때는 깡통 로보트가 정말 신기했다.
'어떻게 주전자 깡통을 뒤집어썼을 뿐인데 저렇게 표정이 살아움직이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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