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나를 규정할 것인가? 나는 세상이 내게 붙여주는 칭호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남이 불러준 이름은 남이 다시 빼앗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내가 스타 피디인줄 알았다. 그런데 작품 몇 개 망하고 나니 그런 환상은 금세 사라지더라. 아, 유명세란 것이 이렇게 허망하구나, 참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사람과의 관계로 자신을 규정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다. 관계 만큼 불안정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경제적 지위를 기준으로 자신의 계급을 정하고 사는 건 더더욱 위험한 일이다. 돈이란 것처럼 쉽게 사라지는 게 또 없다. 그러니 난 세상이 내게 불러주는 명칭에 연연하지 않을 테다. 이름에 목매기 시작하면 나는 세상의 노예가 될 테니까.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고 사랑스러워하는 명칭은 덕후다. 그게 나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나를 규정하고 살면 빼앗길 일이 없다. 물론 여기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돈이 들지 않아야 한다. 함부로 돈 드는 취미를 시작했다가 돈의 노예가 되는 건 싫다. 난 언제든지 공짜로 즐길 수 있는 대상만 탐닉한다. 도서관의 책이라든가, 회사 자료실의 만화라든가. 스마트폰 속 웹툰이라든가.
'좋은 드라마 원작을 찾기 위해 웹툰을 많이 봅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건 구라다. 솔직히 그냥 만화가 좋아서 웹툰을 본다. 나중에 뭐가 되고 말고는 신경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즐기고 싶은 것을 즐길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뭘 봐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만화 추천'을 검색해서 들어갔다가 답글을 읽다 '이게 뭐지?'하고 다시 보면 친절한 초딩이 올려놓은 목록임을 깨달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웹툰을 주로 즐기는 세대와 나 사이의 간극을 좀 느낀다. (물론 아주 크지는 않다. 그 간극이... ^^) 초딩들이 올려놓은 추천 목록 말고 전문가들이 짚어주는 곳이 없나? 했는데... 드디어 생겼다!
만화 비평 전문 웹진! 에이코믹스!
만화를 좋아하는 이라면 꼭 한번 들러보시기 바란다. 누구라도 이곳에서 재미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만화 속 배경이 되는 장소로 떠나는 여행기라든지, 추억 속 명작들을 되짚어보는 코너라든지, 덕후에게는 종합선물셋트같은 공간이다.
얼마전 씨네21을 보니 내가 못 본 어떤 영화가 2013 최고의 한국 영화로 올라 있더라. 영화광으로서 이 정도는 봐줘야지 하는 생각에 찾아서 보고 실망이 컸다. 하나도 재미없는 영화가 1위라니! 비평가들이 대중들보다 너무 앞서가는 건 좀 불만이다. '도대체 왜 이게 최고의 영화인거지? 내 취향이 너무 후진건가?' 하고 좌절시키기만 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2013 ACOMICS AWARDS는 참 만족스러웠다. 특히 국내만화 베스트 5는 꼭 한번 들러보시기 바란다.
http://acomics.co.kr/archives/9059
(위 링크를 누르면 베스트 목록으로 갑니다~)
1위에 올라있는 강풀의 '마녀'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다, 공동 1위를 차지한 가스파드의 '선천적 얼간이들'이라는 제목에 '으잉? 이건 또 뭐지?' 했다. 영화는 베스트 목록에 올라간 작품을 극장에서 다시 찾아보기 쉽지 않지만, 웹툰은 언제든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달려가서 봤다. 크하하! 완전 재미나다, 이 만화!
아직 못 보신 분들은 주말에 한번 정주행보시길~
딴건 몰라도 2013 베스트, 이런건 한번 즐겨줘야 한다.
아래는 '선천적 얼간이들' 링크~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478261&no=1
추운 겨울에는 배깔고 누워 뒹굴거리며 만화 보는 게 최고다. 심지어 웹툰은 만화대여소까지 달려갈 수고조차 필요 없다. 최고의 취미다!
에이코믹스, 재미난 게 가득한 공간이자, 재미난 게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소중한 정보로 가득한 곳이다. 덕후들에게 멋진 놀이터를 선사해준 윤태호 작가님에게 감사드린다.
(심지어 베스트 5에 자신의 작품들을 굳이 뺀 그 쉬크함에 찬사를! ㅋㅋㅋ
누가 뭐래도 내게 작년 만화 베스트 1위는 '미생'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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