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블로그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야 운좋게 MBC에 입사해서 예능 피디나 드라마 피디라는 직업을 만났으니 그런 얘기를 하는게 아닌가. 요즘처럼 스펙 경쟁 치열하고 취업이 힘든 시절에 대학생들에게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라는 건' 좀 무책임한 충고 아닌가 하고. 그러다 제 대학시절 성적표를 봤습니다.
정말 처참하지요? 3학점 짜리 전공과목은 주로 C아니면 D입니다. 오른쪽이 대학교 3학년인 1991년도인데요. 1학기에 석유시추공학 C, 암석역학 C +, 2학기 광상학 C, 광물처리공학 D를 받지요. 성적표에 나오지 않지만 석탄채굴학처럼 F를 받아 아예 성적표에서 빠진 과목도 수두룩합니다.
제가 나온 자원공학과는 원래 70년대 광산학과였어요. 광물처리, 석탄 채굴, 석유시추, 이런 공부를 하지요. 대학에 들어가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아 많이 방황했어요. 저는 원래 1지망 산업공학과를 썼는데 내신이 낮아 (15등급 중 7등급) 탈락해서 2지망 간 거거든요. 부모님은 강력하게 재수를 권하셨지만 저는 재수가 싫었어요. 내 청춘의 1년과 바꿀만큼 가치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냥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에 자원공학과에 입학했어요.
그런데 가보니 그것도 쉽지 않더군요. 전공이 정말 재미없었거든요. 공부만 해도 이렇게 지겨운데 이걸로 평생 먹고 살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택을 했지요. 전공을 포기하기로. 수업 시간에는 뒤에 앉아 소설만 읽었구요. 시험에서는 아는 것만 쓰고 나머지는 백지로 제출하고 가장 먼저 나왔어요. 시험친다고 앉아있는 시간도 아깝더라구요.
원래대로 산업공학과를 갔다면 저는 공업 경영인의 삶을 살았겠지요. 아쉬움에 저는 영어와 경제, 경영 과목을 신청합니다. 영문과 수업인 영어 독해 지도에서 B +, 경영학과 수업인 국제경영에서 A, 현대사회와 경제 A +, 현대사회와 경영 B +. 내 자신에게 증명하고 싶었던거지요. 난 원래 꼴찌가 아니야.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한다면 이렇게 좋은 성과도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얼마전 이 성적표를 보고 혼자 한참을 웃었어요. 아, 나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똑같구나.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사는 거. 나이 마흔 일곱에도 참 철없는 어른인데, 스무살때도 똑같더라구요. 아마 이런 제 성정은 죽을 때까지 안 바뀔 것 같아요. 왜? 이게 좋거든요. 전.
대학 시절, 즐거웠어요. 읽고 싶은 책을 원없이 봤으니까요. 1년에 200권을 읽었어요. 국내 번역 안 된 소설을 읽느라 영문 페이퍼백을 300권 가까이 읽었어요. 그러고나니 영어 실력은 절로 늘더군요. 대학 3학년 때 전국 대학생 영어 토론대회에 나가 2등상을 타고 그 상금으로 유럽 배낭여행도 갔어요. 4학년 1학기 마치고 남들 다 취업 준비하느라 바쁜 여름방학에 저 혼자 배낭여행을 떠난거지요. ㅋㅋㅋ 참 철없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감사한 결정이에요. 그때 배낭여행의 즐거움을 알게된 덕분에 92년 이후 지금까지 매년 해외여행을 즐기게 되었으니까요.
배낭여행에서 돌아와서 6개 무역회사에 원서를 냅니다. 그런데 다 떨어졌지요. 삼성 물산 같은 회사는 아예 관련 전공이 아니라고 전형 기회도 없었고, 효성 물산 같은 회사는 1차에서 떨어트리더군요. 정말 이름없는 중소기업까지 다 떨어졌어요.
그제서야 제 성적표를 다시 들여다봤어요. 전공 학점이 2.0대 더군요. C 아니면 D... 그 시절에는 조금만 공부하면 다 A나 B를 줬는데 말입니다. 이건 대놓고 포기한 녀석의 성적이거든요. 취업을 못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별로 불안하진 않았어요.
'세상이 나에게 일을 주지 않으면, 나도 세상에 일을 구걸하지 않겠다.'
물론 그런 생각도 오래 가진 않았어요. 세상에 일을 구걸해야 했지요.
마지막에는 물산을 고집하지 않고 영업직 전형에 원서를 넣었는데 거긴 합격했어요. 물론 그 첫 직장도 한 2년 다니다 그만두었지요. 재미가 없었거든요... 회사 때려치고 나와서 퇴직금 들고 호주에 한달반짜리 배낭여행 갔어요. 주위에서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어떻게 네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세상을 사냐.'고. 그럼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기에도 짧은 인생, 즐겁지도 않은 일까지 하고 살아야 하나요?
MBC 피디가 되었기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라'고 하는 건 아니구요.
어려서부터 '즐거운 일을 하고 살겠어'라고 마음먹었기에 피디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피디가 안 되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아마 별 후회는 없었을 것 같아요. 어딘가 도서관에 틀어박혀 내가 좋아하는 책은 실컷 읽으며 살았을테니까요.
인생의 바닥을 각오한다면, 두렵지 않아요. 세상에는 공짜로 즐길 수 있는게 너무 많거든요. 돈에 연연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 즐거운 일을 찾아서 살겠어라고 마음 먹습니다.
스무살 철없던 어린 시절의 결정을, 아직도 저는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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