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석님의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덕분에 재미난 소설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중 압권은 다카노 카즈아키의 '제노사이드'다.
전지구적 스케일의 사건을 일본이라는 국지적 무대에서 잘 푸는 게 일본 작가들의 특기인데, 이번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한 학자가 죽고 그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의문의 편지를 읽게 된다. 전형적인 이공계 오타쿠인데 만약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단서라면 그가 해야할 행동은 무엇일까? 한편 미국의 대통령이 아프리카 내전에 관련해 어떤 작전을 승인한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 혹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그가 과거에 내린 결정은 이슬람 국가에 대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번에 그가 승인한 작전 역시 제노사이드는 아닌지? 불치병을 앓는 아들의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목숨을 건 작전에 지원한 용병이 있다. 아프리카 내전으로 투입된 그가 목격하게 되는 인종학살의 현장... 일본 이공계 대학생의 실험실, 미국 백악관의 전쟁지휘실, 아프리카 내전의 현장, 세 남자의 운명이 얽힌다. 인류의 미래를 놓고.
역시 구라도 이 정도 규모는 되어야 읽을 맛이 난다. ^^ 허황된 이야기같지만, 작가는 꼼꼼한 디테일로 이야기의 세 축을 정교하게 얽어맨다.
'제노사이드'란 인종학살을 뜻한다. 소설의 표지에도 나오는 질문이다. '어째서 인간만이 자신의 종을 죽이는 것일까?'
'예를 들어 적이 인종적으로 다르며, 언어도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다르게 되면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며 그만큼 죽이기 쉬워진다. 평소에도 다른 민족과 심리적인 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스스로가 소속된 민족 집단의 우월성을 믿으며 다른 민족을 열등하다고 느끼는 인간이 전쟁에서 손쉽게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평소에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사람을 한둘쯤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싸우는 상대가 윤리적으로도 열등한, 짐승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라고 철저하게 가르쳐 두면 정의를 위한 살육이 시작된다.'
가즈아키는 주인공 중 한 명을 한국인 유학생으로 설정하고, 일본군의 난징 학살이나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학살 당사자인 일본의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이야기 일수 있는데, 과연 인종학살이 일본만의 일일까? 우리의 근현대사를 돌아봐도 제주 양민 학살이나 보도연맹 학살 등 우리 역시 제노사이드에서 자유롭지는 않은 국민이다. 어떻게 민족도, 언어도, 종교도 같은 사람을 죽일 수 있었을까?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빨갱이'라고 이름붙이고 '반동 분자'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면, 나와 같은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친구일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이데올로기의 이름을 붙이고 나면 개성은 사라지고 적으로 규정될 뿐이다. 민청학련 사건의 비극 역시 마찬가지다.
MBC 동료들 가운데, 시사교양국 피디들이 있다. 김재철 사장이 온 후, 시사교양 피디는 3명의 해고자를 내고, 현재 전체 50명 가운데 반수 이상이 현업에서 쫓겨났다. 최승호, 이근행, 강지웅... 피디수첩의 역사를 써내려간 피디들이 다 해고되었고, 10년이상 피디수첩을 만들어온 작가들까지 전원 해고된 상태다. 피디수첩 관계자들을 상대로 인종학살을 벌인 김재철 사장. 청와대의 하수인인 김재철은 그렇다치더라도, 어떻게 그 밑의 국장과 부장들이 학살의 공범이 되버린걸까? 그들과 함께 10년 이상 한 사무실에서 일해온 동료와 선후배들이 아니던가?
3차 교육발령이 나왔다. 파업 6개월 후, 정직 2개월을 받은 이들이 징계가 끝나자 3개월 간의 교육발령을 받은 셈이다. 하나의 죄로 두번 사람을 죽이는 것... 이미 정직 2개월의 형량을 마친 이들에게 다시 교육발령을 내어 업무 복귀를 막는 것, 정말 잔인한 짓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잔인해 질 수 있는 조건? 함부로 이름을 붙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라는, 조센징이라는, 투치족이라는, 탈레반이라는, 베트콩이라는... 언론 자유를 외치고, 공영방송 정상화를 외친 이들에게 '종북좌파'와 '빨갱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들을 해고로 내몰고,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그들의 인격을 유린하는 것이 더 쉬워지는 것일까?
업무 복귀 후 2달은 학살을 지켜보는 것 처럼 괴로운 나날이다. 사는 것이 힘들 때, 나는 항상 책으로 피신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하드보일드 소설에 빠져산다. 소설 '제노사이드'를 보며, 인간의 잔인함을 다시 한번 실감하지만 소설보다 현실이 더 무섭다.
'무서운 것은 지력이 아니고, 하물며 무력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인격입니다.'
인격이 없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 두려운 일이다. 하드보일드한 세상에 희망이 있을까? 이 길의 끝에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일단 살아남고 보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짐승의 길을 선택하는 이도 있지만, 우리에게 최선은 인간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인간답게 사는 게 힘들어도 적어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지.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해... 사람답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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