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에게 캐스팅은 숨겨진 재능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내게는 나만의 캐스팅 노하우가 있다. 드라마 편집 기사를 만나면 항상 물어본다. ‘지난번 작품에서는 누가 잘했어요?’ 오케이 컷으로만 이루어진 방송본을 보고 배우의 진짜 실력을 짐작하기는 어렵지만, 편집자는 엔지 컷 수 십 개를 다 보며 작업하기에 배우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친한 편집자가 시트콤 ‘크크섬의 비밀’을 작업했기에 물어봤다. 혹시 그 작품에서 추천할 배우 없냐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윤상현!’ 하고 대답했다. 배우 윤상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난 그 말에 미간을 찡그리며, ‘그 좀 찌질하게 나오는 친구?’하고 의아해했다. 나는 윤상현의 전작들, ‘겨울새’나 ‘크크섬의 비밀’을 보고 ‘생긴 건 기무라 타쿠야 삘인데 좀 찌질한 캐릭터네?’했다. 그랬는데 편집자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찌질한 것 같은데, 자꾸 보면 그게 오히려 매력이에요.”
그 다음해 내가 공동연출을 맡은 드라마가 ‘내조의 여왕’이었다. 대본을 보고 캐스팅을 하는데, 극중 윤태준 사장 역할이 제일 난관이었다. 여주인공 김남주 씨를 극중에서 도와주는 재벌 2세 키다리 아저씨, 로맨스 느낌을 살려야하는 바람둥이이자 순정남, 여성 시청자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어 배우도 뜨고 작품도 뜰 수 있는 중요한 배역이었다. 잘 생기고 돈 많은 재벌2세지만 김남주에게만은 찌질한 백수로 보여 늘 태봉씨라고 놀림 받는 캐릭터였다. ‘언뜻 보면 찌질한 백수지만 알고 보면 매력남이라!’ 난 그 역할에 윤상현을 밀었다. 주위에서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친구가 해서 잘 된 작품이 별로 없었는데요. 나이도 많은데 아직 안 뜬 거 보면 힘든 거 아닌가?’
뜬 배우와 안 뜬 배우로 나누는 게 아니라, 뜬 배우와 뜰 배우로 나눠야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자신에게 딱 맞는 역할을 만난다면 누구나 뜰 수 있다. 오랜 시절 신인들과 작업한 나의 경험에서 나온 교훈이다. 자신에게 딱 맞는 역할을 만나면 뜰 수 있다는 거, 이건 배우에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직업을 찾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배우에게 딱 맞는 역할을 찾는 것이 캐스팅이라면, 자신에게 딱 맞는 일을 찾는 것은 구직이다. 캐스팅할 때 PD의 자세는 ‘멀티플라이어’라는 책에 나오는 ‘재능자석’의 자세와 비슷하다. 멀티플라이어는 사람의 재능을 단순히 더하는 것이 아니라 몇 배로 끌어내는 사람을 뜻한다. (멀티프라이 multiply 배로 곱하다.)
멀티플라이어가 인재를 찾는 4가지 방법을 살펴보자. 첫째, 어느 곳에서든 인재를 찾는다. 둘째, 사람들의 타고난 재능을 발견한다. 셋째, 재능을 충분히 활용한다. 넷째, 방해자를 제거한다. 누구나 멀티플라이어를 만나면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으로 키울 수 있는데, 만약 멀티플라이어를 만나지 못한다면 재능을 발견해줄 누군가를 마냥 기다려야 할까? 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몇배로 능력을 발현하게 하는 스스로의 멀티플라이어가 되자.
첫째, 어느 곳에서든 인재를 찾는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천재성을 인정하고 경계를 무시한다는 뜻이다. 김태호 피디가 무한도전의 멤버를 처음 모았을 때, 비호감 열전이 아니냐는 핀잔을 들었다. 그러나 김태호는 호감이냐 비호감이냐로 출연자를 나누기보다 멤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살려 캐릭터를 쌓았다. 그 결과 무한도전은 각자의 성격이 분명한 출연자들의 캐릭터 코미디물이 되었다. 세속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장점을 찾아 재능으로 특화시키는 것, 취업 무한도전을 위한 첫걸음이다.
둘째, 감춰진 재능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다른 일보다 잘하는 일이 무엇인가? 다른 사람보다 잘하는 일이 무엇인가? 특별한 노력 없이도 잘하는 일이 무엇인가? 요청받지 않고도 하는 일이 무엇인가? 대가를 받지 않고도 기꺼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재능자석이 다른 이에게서 숨겨진 능력을 찾기 위해 던지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자신의 재능을 찾아보자.
셋째, 사람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관리자의 목표라면, 우리 삶의 과제는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찾는 것이다. 취업의 기회가 제한된 현실에서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모두가 정우성을 쫓아다닐 때 10년 뒤 조인성을 키우는 마음으로, 누구나 가기 바라는 대기업보다 내가 키울 수 있는 중소기업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원빈 같은 인기직종도 좋지만, 양동근 같은 숨은 보배 같은 일자리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넷째, 멀티플라이어는 인재를 키우기 위해 방해자를 제거한다. 구직을 하는 데 있어 훼방꾼은 바깥에 있지 않고 주로 내 속에 있다. 취업에 방해되는 나쁜 습관이나 버릇 같은 것, 특히 어떤 일을 해보기도 전해 ‘해도 안 될 거 괜히 지원했다가 마음의 상처만 입을 필요 없잖아?’하고 속삭이는 마음이 있다면 단 칼에 베어버리자. 될지 안 될지는 해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
인생의 행복, 단순하다. 하고 싶은 일, 하고 있는 일, 남보다 잘 하는 일, 이 세 가지를 일치시키면 된다.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드라마 피디가 된 건 나이 마흔 살의 일, 마흔이 되어서야 겨우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고 있는 일을 일치시켰다. 아직 남보다 잘 하는 일까지 일치시키지는 못했지만, 그건 남은 평생 노력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남보다 잘 하는 것은 천천히 해도 된다. 그러나 20대에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하고 싶은 일’, 즉 적성을 찾는 일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방향을 정하고 목표를 정하는 데 있으니까.
추신:
책을 보면 '멀티플라이어'의 반대말로 '디미니셔'를 든다. 어떤 조직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주위 사람들의 능력과 의욕을 떨어뜨리는 조직의 암적인 존재를 말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장은 조직을 초토화하고 경쟁력과 브랜드 이미지를 추락시킨 것도 모자라 일하겠다는 후배들 말리고 잘 하는 사람 자르고 특정 무용인만 집중 육성하더라. 조직을 살리는데 최우선 과제는 멀티플라이어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눈에 보이는 디미니셔를 제거하는 데 있다.
아, 오늘만큼은 정말 좋은 글만 쓰고 가려고 했는데, 또 끝내 참지 못하는 걸 보면, 역시 나는 수양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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