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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민주주의의 위기, 무엇을 할 것인가?

by 김민식pd 2025. 3. 31.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위기가 닥쳐오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나중에 깨닫게 되지요. ‘그 때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구나.’ 1994년 첫 직장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던 어느 날, 저의 세일즈 보고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상사가 제게 그랬어요. “김민식 씨, 우리 옥상에 가서 권투 시합 한번 할까? 사나이 대 사나이로 넥타이 풀고 화끈하게 한번 붙자, 응?” 저는 지금도 그 순간 그분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잊지 못합니다. ‘난 정말 널 한 대 쥐어패고 싶어 죽겠어.’ 요즘 같으면 사내 폭력으로 신고할 일이지만 1990년대 초반 직장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어려서 가정 폭력과 학교 폭력을 견디며 살았어요. 하지만 성인이 된 내가 직장 폭력까지 견디며 살 이유가 있나요? 사표를 쓰고 나와 이를 악물고 공부해서 외대 통역대학원에 진학하지요.


1996년에 MBC 피디 공채 합격 발표를 듣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어요. 그랬더니 아버지 말씀. “너 나중에 너를 괴롭혔던 그 대리 찾아가서 고맙다고 큰절이라도 올려라. 그 양반이 니 인생의 큰 은인이다. 그 사람 아니었으면 니가 어떻게 MBC 피디가 되었겠냐.” 살다 보니 세상에는 은인이 참 많더라고요. 피디인 저를 송출실로 쫓아내어 굳이 책을 쓰게 한 분도 은인입니다. 위기는 전환점입니다. 내 인생을 더욱 빛나게 해줄 기회가 온 거지요. 고민이 필요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은 공부에 있어요. 오늘의 내가 위기를 맞아 답이 없다고 느끼는 건 지금은 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답을 찾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12월 3일 계엄이 선포되는 걸 보며 느꼈어요. 중무장한 군인들이 국회를 침탈한다고? 대한민국에서 지금 이런 일이 가능해?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쳤어요. 법을 수호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야 할 의무를 지닌 자들이 계엄 사태를 일으켰어요. 지금 이 순간 역사의 기로에 섰어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공부를 해야 합니다.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는 미래를 몰라요. 아직 오지 않았고 수만 가지 가능성이 있지요. 그래서 답을 찾을 때는 과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계엄군이 권력을 장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의 역사는 알려주고 있어요. 바로 가까운 예가 영화 <서울의 봄>에서 다룬 12.12 군사 반란이지요. 군부 집권을 끝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영화 <1987>이 잘 보여주고 있고요. 역사를 돌아보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답을 찾습니다. 그걸 위해 역사학자 심용환 저자의 책을 읽었습니다. 

<민주공화국의 적은 누구인가> (심용환 / 사계절)

‘2024년 12월 3일,
이날은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만 같았던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3분. 별안간 대통령이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했다. 상기된 얼굴을 한 그는 빠르게 준비한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된 그 짧은 담화는 야당을 비롯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자신이 만들어낸 ‘비상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대통령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북한 공산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 새로운 의무가 부여됐다. 어제의 계엄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할 것인가? 12·3을 계엄으로 권력을 찬탈한 5·16과 12·12 옆에 놓을 것인가, 아니면 민주시민이 힘을 합쳐 독재권력에 맞선 4·19, 5·18과 나란히 기록할 것인가. 계엄령이 발효되었던 6시간보다 훨씬 더 길고 힘들 시간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에게 주어졌다.’

(출판사 책 소개글 중에서)



저는 이 책의 목차를 보면서 추리소설의 구조를 떠올렸습니다. 

1. 비상계엄 
2. 대통령 
3. 군부 
4. 공무원 
5. 검찰 
6. 사법부 
7. 국회 
8. 기독교 
9. 경제 
10. 뉴라이트 
11. 북한과 국제관계 
12. 국민 

가장 먼저 비상계엄의 기록이 나옵니다. 심용환 저자는 사관의 심정으로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조목조목 기록합니다. 마치 사건이 일어난 범행 일지를 시간별로 정리한 것 같아요. 그런 다음 그 사건을 일으킨 범인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용의자들이 순서대로 나오지요. 대통령, 군부, 공무원. 계엄을 실행한 건 대통령과 군부와 경찰 공무원입니다. 비상계엄이 몇 시간만에 해제되었으니 위기가 끝난 걸까요? 이후에 벌어지는 일을 통해 검찰, 사법부, 국회, 기독교 등의 민낯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제 이 사태가 어느 한 명의 광기가 부른 사건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민주주의란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제도입니다. 이들과 함께 민주와 자유의 가치를 지키며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심용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짊어져야 할 책임을 감당할 때가 되었다. 보다 정밀한 대안이 모색되고 구체적인 요구가 시도되어야 한다. 헌법 개정, 대통령의 권한, 관료의 역할 등은 단순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변화가 필요하다. 권력 나누기. 헌법은 대통령 연임 문제를 넘어 경제·사회적 변화를 감당해야 하며 대통령은 돌격대장의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 관료와 공무원은 나뉘어진 책임을 누리고 실천하며 새로운 자존감을 부여받아야 한다.’

윤석열의 12·3 내란과 극우파의 1·19폭동은 의도하지 않는 결과를 이루어냈습니다. 그간 대통령과 행정부에 압도되었던 입법부와 사법부의 위상을 극적으로 높였어요. 국회와 법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지요. 이대로 탄핵이 인용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끝일까요?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무척 답답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사람들이 튀어나오는 건지 궁금했어요. 아니, 내가 좋아하는 저자께서 왜 갑자기 대중에게 반중 정서를 퍼뜨리는 글을 쓰는 거지? 유튜브에서 재밌게 본 분이 왜 갑자기 저러는 거지? MBC 170일 파업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대통령이 이상한 사장을 임명하잖아요? 그럼 여기저기 숨어있던 사람들이 갑자기 본색을 드러냅니다. 우두머리가 시범을 보여줬잖아요. ‘이런 짓까지 해도 된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 안에 꼭꼭 숨겨왔던 욕망을 분출하기 시작해요. 그때 깨달았어요. 사람의 본색은 공동체에 위기가 닥칠 때 드러나는구나.

우울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어요. 170일 파업을 할 때 받았던 시민들의 지지와 응원 덕분에 우리는 버틸 수 있었어요. 계엄 사태도 마찬가지지요. 그 밤에 한강 다리를 건너 국회로 달려가 총 든 군인들과 몸싸움을 벌인 시민들 덕분에 국격의 몰락을 막을 수 있었어요. 몇 달 동안 광장에서 보여준 사람들의 민주주의 수호 의지에 감동받는 것처럼요. 



지난 27일에 심용환 저자의 북토크에 다녀왔어요. 지금은 공부를 해야 할 시기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책을 읽고 스승에게 배워야 해요. 책을 읽고 대통령중심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게 되었어요.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은 이제 건설적으로 해체되어야 합니다. 윤석열은 말과 행동으로 이 변화의 필요성을 입증하였어요.

이 책은 역사가가 만든 하나의 지렛대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겠어요. 책은 하나의 생각이고요. 이 생각을 더 많은 이들이 공유할 때 지렛대에 올라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겁니다. 더 많은 이들이 지렛대를 누르면 우리는 세상을 움직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이제 바꿔야 합니다.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날이 어서 끝나고, 다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이 경제 성장의 기적을 이루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21세기 민주주의의 새로운 진화를 보여줄 때입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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