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강연을 듣는 것도 좋아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의 강연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차인표 작가님의 교보문고 보라쇼 강연 영상을 봤어요. 2가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첫째, 작가가 된 이유.
차인표 작가님이 좋아하는 소설가는 존 그리샴인데요. 법정 추리 소설의 대가지요. 원래 변호사로 일하던 분인데 소설가로 전업했어요. 그 덕분에 리얼리티와 디테일이 뛰어난 이야기를 만듭니다. 저는 어려서 로빈 쿡이 쓴 메디컬 스릴러를 즐겨 읽었거든요? 네, 로빈 쿡도 작가가 되기 전에는 의사로 일했어요. 그러니 병원의 세부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 나오지요. 차인표 배우는 존 그리샴 덕분에 편견이 깨어졌답니다. 소설은 소설가가 써야 한다는 편견. ‘변호사나 의사가 소설을 쓸 수 있다면 배우도 소설을 써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집필을 시작했다고요.
두 번째, 차인표 배우가 공채 탤런트가 된 사연.
차배우님은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요. 이민자로 사는 생활은 어려웠답니다. 대학을 다닐 때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다양한 일을 하고요. 체력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근력운동도 했다고요. 한국에 돌아와 문득 탤런트가 되고 싶어 공채 시험을 보는데요, KBS, SBS 원서를 내는 족족 다 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MBC에 지원했는데, 3만 명이 지원해서 남자 7명 여자 15명 뽑는데 최종 합격했다고요. KBS, SBS 다 떨어졌는데 MBC에는 1등으로 붙었답니다. 비결이 무엇일까요?
나중에 피디에게 들었대요. 1993년 탤런트 공채를 앞두고 심사위원들(현역 드라마 피디)이 모여서 회의할 때, 이런 의견이 나왔다고요. “매년 연극영화과 학생들 중에서 배우를 뽑는데, 올해는 연기 공부를 안 했더라도, 연기 실력은 좀 부족하더라도, 경력이 특이한 사람을 뽑아보자. 예를 들어 외국에서 공부해서 영어를 잘한다거나, 운동을 많이 해서 몸이 좋다거나, 아니면 다른 직장 경험이 있거나.” 차인표 배우에게는 3가지가 다 맞아떨어진 거죠. 그래서 공채에 1등으로 합격! 와, 1990년대 원조 몸짱 배우가 탄생한 비결, 영어 잘 하는 재벌 2세 캐릭터가 만들어진 사연이 여기에 있네요. 근데 차인표 배우가 이런 심사 기준을 미리 알았을까요? 모르지요. 그냥 갔다가 최고 점수를 받았어요. 차인표 배우가 한 일은 딱 하나입니다. 포기하지 않은 거, 떨어져도 다시 도전한 거.
저는 이게 MBC의 저력이라고 생각해요. 1996년에 피디 공채에 지원하면서 저는 광산학과 나와서 치과 영업했던 나를 피디로 뽑아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어요. 다만 살면서 만나는 이들이, ‘너는 사람들 웃기는 걸 좋아하니까 코미디 피디를 해도 적성이 맞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 그래서 재미 삼아 한번 지원해봤는데, 덜컥 붙었어요. 차인표 배우의 공채 합격기를 듣고 깨달았어요. 그 시절에 MBC가 사람을 뽑는 방식이 좀 달랐구나. 좀 별나고 독특한 사람을 뽑았구나. 조직의 자신감이지요. ‘어차피 지식과 기술은 우리가 가르치면 돼. 색다른 경력을 가진 친구, 좀 특이한 친구를 뽑아보자.’
제가 얼마 전에 차인표 작가님을 만난 이야기를 SNS에 올렸더니 김선화 배우님이 댓글을 다셨어요.
‘매너 좋기로도 소문난 배우이지요. 2010년 겨울 KBS 특별기획 <명가> 드라마 민속촌 촬영 때 비가 온 날 분장차로 가는데, 어디선가 짠 나타나 우산을 씌워주며, “선생님 미끄럽습니다. 치마자락만 잡으시고 가세요” 분장하고 나오니 또 짠~~ 계단이 미끄럽다고 우산을 받쳐주었답니다.’
아, 정말 남다른 태도를 가지신 분이네요. 멋진 분이 이렇게 매너까지 좋으면, 저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 차인표 작가님의 새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들의 하루>
그 소설에도 사연이 있더군요. 작가의 말을 보면...
‘지난 2011년, 세 인물의 하루를 다룬 장편소설 《오늘예보》를 발표했다. 원래는 일곱 명의 하루가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이야기를 구상했는데, 네 명으로 압축해서 쓰다가 탈고 전 한 명을 더 제외시키고 세 명의 이야기로 출간했었다. 마지막에 누락된 한 명은 ‘공익 1’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세상으로 나오지 못한 채 노트북 한 귀퉁이에 있는 폴더 속으로 사라졌다. 폴더의 이름은 ‘miscellaneous’, 우리말로 번역하면 ‘그 외 다수’였다.
당시 소설이 출간될 즈음 홍보차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나에게 진행자는 “작가라고 불러드릴까요? 아니면 배우라고 불러드릴까요?”라고 물었다. 나는 “10여 년쯤 지난 후에는 작가로 불리면 좋겠습니다”라고 답변을 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났다. 그동안 발표한 장편소설 세 편 중 두 편은 절판되어 서점에서 사라졌다.
“10년 묵은 나무에 꽃이 핀다”는 옛말처럼 2024년 여름, 첫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이 역주행을 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나의 다른 소설들도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출판사 ‘사유와공감’으로부터 《오늘예보》의 복간 제안을 받은 지난여름, 누락되었던 ‘공익 1’을 떠올리며 노트북을 뒤졌다. 그 결과 나고단, 이보출, 박대수 세 명에 정유일이 더해진 《오늘예보》의 확장판 《그들의 하루》를 발표하게 되었다.
책의 절판으로 중단되었던 《그들의 하루》가 다시 시작된 것을 자축하면서, 중단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그들에게, 그리고 지금 이 책을 읽고 있는 그대들에게 시 한 편을 헌사하고 싶다.’
정말 멋진 작가의 말이지 않나요? 그러니까 포기할줄 모르고 도전하는 게 차인표 배우/작가님의 오랜 태도였던 거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소설, 정말 재미있었어요. 제게 친근한 드라마 촬영현장에서 활약하는 주인공이 등장하거든요. 이름은 이보출. (보조출연의 줄임말. ^^) 엑스트라 버스를 타고 촬영장으로 향하는 길에 주인공의 독백.
‘내가 지금 이 시각에 일터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변수들이 있었는지 헤아려 보면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독립운동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웬 변수가 그리도 많냐고? 순서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우선 유명 작가, 무명작가, 신인 작가, 작가 지망생 포함, 많은 작가가 다양한 작품들을 썼겠지.
– 작가들은 방송국 드라마 제작국의 높은 사람에게 각자 자기 작품 원고를 보냈을 거고.
– 높은 사람은 자기 책상에 놓인 많은 대본 중 〈양반과 상놈〉이라는 대본을 골랐겠지.
– 그리고 전도유망한 젊은 후배 피디들이랑 일 없어서 놀고 있는 중고 피디들 사이에서 누구에게 일을 줄지 갈등하다가 행운의 주인공을 찍어 연출을 맡겼겠지.
– 연출자가 선정되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연출자 밑으로 나무뿌리가 여러 갈래로 뻗어 내려가듯, 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일거리가 배분되기 때문이다.
– 연출을 맡게 된 피디는 조연출을 선택하고, 조연출은 연출 팀을 꾸렸겠지. 카메라, 조명, 미술, 음악, 오디오, 분장, 소도구, 대도구 등 각 팀장이 선택되고, 각 팀장 밑으로 팀원들이 구성되었겠지. 주연, 조연, 단역 순으로 배우들도 캐스팅됐겠지. 잘나가는 배우는 출연 안 하겠다고 도망 다니고, 못 나가는 배우는 출연 좀 시켜달라고 쫓아다녔겠지.
– 배우들까지 캐스팅되고 난 후, 맨 마지막으로 피디는 고려예술, 이쁜이예술, 길따라예술 등 수많은 보조출연자 동원회사 중 어느 회사와 일할지 고민하다가 고려예술을 낙점했겠지.
– 피디는 고려예술에서 보조출연자 팀을 운영하는 허 반장, 주 반장, 유 반장, 길 반장 등 여러 반장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길 반장을 선택했겠지.
– 피디의 성은을 입어 〈양반과 상놈〉의 보조출연 팀 팀장이 된 길 반장은 고려예술에 등록된,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 보조출연 희망자들의 명단을 훑어보면서 자신과 운명을 함께할 44명의 팀원을 골랐겠지. 그중에 나도 포함된 것이다.
이렇게 터프한 경쟁과 변수를 뚫고 나는 오늘 일터로 가는 버스에 오르게 되었단 말이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캬, 구구절절 와닿는 이야기네요. 드라마 제작 현장의 워크 플로우를 이보다 더 맛깔나게 설명하기도 힘들 것 같아요. 이경규 님이 요즘 '소확행보다 대확행'이라는 말씀을 하더군요. 월급 받아서 소확행을 누리지 마라. 월급을 받는다는 거,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커다랗고 확실한 행복이다고요. 맞아요. 지나고보니 드라마 피디로 일할 수 있었다는 게 제 인생에 최고의 행운이었지요.
그런 드라마 피디는 스트레스도 참 많아요. 차인표 작가님은 소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원형탈모증에 걸릴 위험이 큰 직업 3개가 있는데요. 1위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군대의 사령관, 2위는 드라마나 영화를 연출 중인 감독, 그리고 3위가 언어가 전혀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간 가족의 가장이라고요.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결정권자라는 점이지요. 사령관의 결정에 따라 부하들은 죽거나 살아요. 감독의 결정에 따라 양반이 상놈으로 변할 수도 있고, 50부작이 30부로 조기종영 될 수도 있어요. (아, 아픈 상처가... ^^) 이민 간 가정의 가장 역시 사랑하는 가족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해야 하는 결정권자입니다. 매 순간 크고 작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들은 누적된 스트레스로 인해 원형탈모증에 걸릴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요.
피디로 일할 때 늘 스트레스였어요. 시청률이 안 나오면, 작가의 밥줄이 끊기고, 배우의 광고가 날아가고, 제작진의 일감이 줄어드니까요. 퇴사하고 이제 저는 마음 편한 하루하루를 삽니다. 무엇보다 좋은 건, 재미난 소설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
차인표 작가님의 신작, <그들의 하루>도 정말 재미나게 읽었어요. 장난기 가득한 유머 코드가 가득한 책이거든요. 언젠가 차인표 작가님이 방송가 뒷 이야기를 다룬 시트콤 같은 작품을 만드셔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차인표 작가님의 다음 작품을 조신하게 기다립니다.
이번 한 주도 우리, 중단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나아가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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