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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이렇게 귀한 민주주의

by 김민식pd 2025. 3. 17.

지난 1월에 3주간 스리랑카를 여행하며 계속 드는 의문이 있었어요. ‘여기는 왜 이렇게 여행자 물가가 비싼가.’ 툭툭 운전자들이며 숙소며 식당이며 다들 외국인 여행자를 대상으로 담합을 한 듯 가격이 비쌉니다. 이 나라의 경제 수준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아요. 스리랑카 시골 호텔의 크리스마스 디너가 1인당 10만 원입니다. 국민의 다수가 불교도인 스리랑카 사람들에게는 성탄절이 아무 의미가 없어요. 하지만 서양에서 온 여행자들은 그날 특별한 정찬을 원하지요. 그래서 엄청 비싼 가격에 팝니다. 다들 왜 이러는 걸까요? 국가가 시범을 보이니까요. 나라에서 여행자들에게 시기리아 바위산에 오르는데 받는 입장료가 5만 원입니다. 현지인들에게는 무료입니다. '아, 바위산 하나 보는데 5만 원을 내니 밥 먹는데 1만 원은 당연히 쓰겠지.' 어지간한 로컬 식당에서 주문을 하면 1인당 만 원이 나옵니다. 스리랑카의 시간당 최저 임금은 430원입니다. 경제의 격차가 우리나라랑 20배가 넘으니 물가도 20배 차이가 나야 하는데요. 여행자들에게는 바가지 요금이 적용됩니다. 왜 이러는 걸까요? 스리랑카는 국가 부패지수가 높습니다. 그래서 시장 진입장벽이 높아요. 툭툭이든 식당이든 숙소든 세금을 비싸게 물립니다. 나라가 자영업자들에게 삥을 뜯어요. ‘억울해? 그럼 너희는 돈 많은 외국인들에게 삥을 뜯으면 되잖아.’ 

2009년에 베트남 여행을 갔을 때는 메뉴판이 두 개였어요. 현지인들과 외국인에게 따로 적용되는 이중가격제가 있었어요. 그때는 묘하게 호구 취급당하는 것 같아 불쾌했는데 2022년에 가보니 그게 사라졌더군요. 베트남 여행의 가성비와 만족도가 동시에 올라갔어요. 그래서 매년 갑니다. 쿠바, 미얀마, 스리랑카는 한번 가면 두 번 가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서 그런 나라는 오지로 남는 겁니다. 아마 그 나라의 위정자들은 아직 그래도 괜찮다고 느낄 겁니다. 왜? 지구촌 사람들에게는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에 가고 싶은 욕망도 있으니까요. 바가지로 한번 온 손님을 옴팡지게 털어먹는 것보다 더 좋은 건 한번 온 사람을 단골로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저는 매년 베트남에 다시 갑니다.

살다 보면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힘없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사람을 만나도 그러려니 하고 참고 삽니다. 문제는 내게 권력이 주어질 때입니다. 내가 힘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게끔 할 수도 있거든요. 어렸을 때 누가 어깃장을 부리면 “동무는 아오지 탄광이야요.”라는 말을 우스개로 했어요. 북한에서는 집권층과 생각이 다른 사람은 사상 교육을 위해 격리 수용합니다. 나치의 히틀러가 한 짓도 그렇고, 소련의 스탈린이 한 짓도 그래요. 아우슈비츠나 시베리아 수용소는 그래서 비극의 역사이고요. 민주주의는 그래서 어렵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거든요. 

우치다 타츠루 선생이 쓴 <무지의 즐거움>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윈스턴 처칠은 하원 연설에서 민주주의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죄악과 불행의 세계에서 이제까지 수많은 형태의 정치 체제가 시도되었고, 앞으로도 시도될 것이다. 민주주의가 완벽하고 전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 체제다. 단 여태까지 시도된 다른 모든 형태의 정치 체제를 제외한다면.”



제가 여행을 다니며 보는 유적이며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것은 사실 독재의 흔적입니다. 피라미드는 왕 단 한 사람의 무덤입니다. 죽은 자의 안식처를 만들고자 산 사람들이 땡볕에서 죽어라 고생했어요. 타지마할은 왕비의 무덤입니다. 사랑하는 왕비의 무덤을 조성하느라 국왕은 국고를 탕진합니다. 미얀마나 스리랑카에 천 년 전에 세워진 불탑을 봅니다. 벽돌을 쌓아 산을 만드는데 1000명의 전쟁 노예가 동원되었습니다. 다 독재가 남긴 잔재입니다. 

독재가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 하나의 강력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배계급이 믿는 신앙이 있고, 그걸 모두가 믿었습니다. 왕은 신이 보내준 사자이고, 귀족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입니다. 내세에 복을 얻기 위해 우리는 탑을 쌓고 무덤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 논리에 설득된 것입니다. 그 논리를 따르면 삶은 편안해집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고 살면 되거든요. 

독재가 무너지면, 혼란이 옵니다.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는 시대라면 살육의 시대입니다. 인도의 아쇼카는 이복형제 99명을 죽이고 왕위에 오릅니다. 왕의 자식이라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건 살육의 시작입니다. 한 사람만 결정을 하고 남은 사람은 오로지 그 결정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 인류 역사상 내내 최고의 유혹이었을 겁니다. 

민주주의는 어렵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교 전쟁은 그래서 일어납니다.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사는 시스템입니다. 함께 논쟁을 하고 투표를 통해 다수의 의견으로 정해진 것을 나라의 정책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설득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의 수를 늘릴 것인가, 그게 민주주의의 기술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잡아가두고 입을 틀어막는 건 독재의 시작이고요. 독재의 유혹은 늘 있어왔어요. 민주주의는 이루기에 어려운 정치 제도이기에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최악의 제도라고요? 예전의 왕정이나 독재에 비하면 훨씬 좋은 제도입니다. 저는 지난 몇 년 사회주의 국가인 쿠바나 스리랑카를 다녀보고 깨달았어요. 그래도 민주주의가 현재로서 인류가 누릴 수 있는 이상에 가장 가깝습니다. 누구 한 사람 권력자의 눈밖에 난다고 갑자기 죽거나 끌려가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민주주의는 어렵습니다. 국민에게 주권이 주어진다는 것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의견도 존중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도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거든요. 타츠루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민주주의란 ‘그것을 이 세계에 실현하려는 수행적 노력’이라는 형태로, 항상 미완으로밖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한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려는 노력이란 원래 이런 겁니다. 죽을 때까지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더라도, 혹 그 목표를 추구하다가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고 죽더라도 저는 불만이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지난 몇달간 한국의 정치 상황을 보며 느낍니다. 그런데요, 권력을 가진 사람은 유혹을 견뎌야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무력을 동원해 그들을 해산하고 가둬야겠다는 유혹. 민주주의 쉽지 않습니다. 어렵게 일구어가는 한국의 민주주의, 더욱 소중하게 여기며 한발 한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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