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여행기, 4일차입니다.
오키나와는 본섬도 좋지만, 인근에 있는 작은 섬들도 예쁘고 좋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중에서 자마미 섬을 골랐습니다. 스노클링 하기 참 좋은 해변이 있다는 얘기에요. 아침에 차탄의 숙소를 나와 맥도날드에서 아침을 먹고 (일본에 왔으니 A&W를 먹고 싶었는데, 오전 7시에는 영업을 안 하더군요.) 렌트카를 반납하러 T 갤러리아로 향했습니다. 아침 출근 길이라 그런지 차가 많이 막히네요.
렌트카 사무소가 여는 시간이 9시고, 토마린항에서 자마미 섬으로 가는 배가 10시에 뜨니 시간이 좀 촉박합니다. 차가 막혀서 중간에 주유소에 못 들리고 차를 반납했어요. (차를 빌릴 때 만 탱크고요, 반납할 때 기름을 다시 채워 반납해야합니다. 그냥 반납하면 마일리지에 따라 차액을 무는데 조금 비싸요. 3일간 쓴 기름값이 3만원 정도 나오네요. 이 정도면 뭐...^^)
차를 반납한 후, 택시를 타고 토마린항으로 향했습니다. 페리는 오기 2주 전에 인터넷으로 표를 예약했습니다. 자마미 빌리지라는 사이트에서 구매하고 결제했습니다. 여객 터미널에 가서 표를 받고 배 타러 가는데 뒤따라오시던 아버지의 분위기가 이상했어요. 앞에 가는 일본인 중년 남자와 서로 눈싸움을 하는 중... 급기야 아버지가 대뜸 시비를 거시더군요.
"아니, 뭐가 잘못 됐어요?"
난데없이 한국말로 일본사람에게 물어보면 어쩌라고... ㅠㅠ
성격이 급하신 아버지는 길을 가다 급하면 앞사람을 밀치고 가기도 하십니다. 일본 사람들은 예의는 깍듯이 바르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는걸 무척 꺼립니다.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좋아하지 않아요. 아마 앞의 커플이 느리게 길을 가자 아버지가 밀치고 지나가다가 사달이 났나봐요.
40대로 보이는 일본 남자는 아버지를 계속 노려보고 있고, 아버지는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을 봤나!' 모드. 얼른 제가 나서서 사과를 했습니다.
"여행 오신 분이라 여기 사정을 몰라 실수하신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깍듯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를 했어요.
외국어를 배울때 제가 가장 공들여 외우는 표현이 감사 인사와 사과 표현입니다. 두가지만 잘 해도 여행 다닐 때 불편함이 없거든요. (생각해보면 이건 모국어를 쓰는 일상에서도 마찬가지. ^^)
섬에 놀러가는 40대 커플이었어요. 저는 이런 경우, 무조건 제가 사과를 합니다. 여자랑 데이트하는 남자의 체면은 살려주는 게 수컷끼리 매너지요.
어려서 제일 싫었던 게 꼭 데이트 커플에게 시비거는 불량배 형들이었어요.
"어이, 그림 좋은데?"
이런 유치한 멘트, 그건 정말 비겁한 짓이죠. 부러우면 지도 연애를 하던가. 여자에게 작업 걸 용기도 없는 놈들이 꼭 술먹고 옆자리 커플에게 시비를 겁니다. 저는 커플에게는 무조건 한 수 양보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예의입니다.
아버지는 평생 교사로 사신 탓인지 권위에 대한 도전을 못 견디십니다. 심지어 공고 훈육주임이었어요. 말 안듣는 덩치들을, 몽둥이로 길들이셨지요. 명절에 큰집에 가서도 꼭 조카들이랑 싸우십니다.
누가 "작은 아버지가 그때 그러시면 안되는 거잖아요." 하면 바로, "뭐야 이 자식아?" 하고 버럭하십니다. 명절마다 그 사달이 나기에 추석이면 그냥 제가 모시고 해외여행을 떠납니다. 집안의 평화를 위해 이 한 몸 바칩니다. ^^
직업적인 권위로 따지자면 드라마 감독도 빠지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제가 "큐!"하고 외치면 수십명이 일제히 움직이고, "컷!"하면 일제히 멈춥니다. 이런 작업에 익숙해지다가 권위에 중독될까 두려워요. 권위에 중독되면 말년이 외롭거든요.
'성장에 익숙한 삶과 결별하라'는 책도 있지만, 저는 퇴직 후, 남자들의 과제는 '권위에 익숙한 삶과 결별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가부장제도가 무너지고 있어요. 예전에는 50대에 퇴직한 아버지가 집에서 10년 정도 살다가 60대에 돌아가십니다. 그러면 유산을 물려줄 수 있지요. 이제는 퇴직하고 30년을 더 삽니다. 당장 노후파산이 두려운데 자식에게 얼마나 물려 줄 수 있을 지 모르겠어요. 예전에 아버지의 권위는 돈에서 나왔는데, 이제 수명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그게 힘들어졌어요.
가부장의 권위가 무너졌는데, 옛날 생각하면서 권위를 그대로 내세우며 살면, 긴 세월 오래오래 외로울 수 있어요.
외국 여행을 다니다보면, 엄마와 딸이 사이좋게 다니는 팀은 참 많은데, 저희처럼 아버지와 아들이 다니는 팀은 잘 없어요. 아마도 한국의 아버지들은 권위주의적이라, 여행하기 좋은 파트너가 아닌가봐요. "여긴 음식이 왜 이러냐? 여긴 숙소가 왜 이래? 여긴 볼 게 왜 이리 없냐?" 이러면 정말 다니기 힘들어지거든요. 권위를 내려놓아야 편안해집니다.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다니면서, 문득문득 아버지의 노년에서 저의 미래를 봅니다. 그래서 또 많이 고민을 하게 되고, 배우게 됩니다.
나이들어서는 권위에 익숙한 삶을 경계해야하는구나...
배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리니 저 멀리 케라마 제도가 보이네요. 자마미 섬은 여기 이 케라마 제도에 있습니다. 작은 섬들이 모여있어요.
10시에 훼리 자마미로 토마린항을 떠나 자마미 섬에 도착하니 12시. 내려서 점심을 먹으니 오후 1시. 시간이 애매하네요. 일본에서는 숙소 체크인 시간 (오후 2시)을 엄격하게 지킵니다. 체크인까지 1시간 정도 남았는데, 그렇다고 9월 한낮의 뙤약볕에 배낭을 메고 다니기도 애매하고, 그냥 숙소 앞에 가서 쉬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나가던 주인이 마침 알아보고 방을 내줍니다. 역시 섬이라 인심이 좋군요. 짐을 부리고 낮잠 한 숨 자고 좀 쉬었다가 오후 4시쯤 해변으로 나갑니다.
후루자마미 비치!
제가 오키나와에 오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 이 해수욕장 때문이지요.
그 이야기는 내일 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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