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박제가의 정유각집 중권에서 추린 글을 올립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이 귀양살이 하며 지은 시를 보며, 마음을 다스립니다. 공부의 끝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을 향하는 것임을 가르쳐주는 글들입니다. 고전 한시를 읽다보면 지금 우리가 이 순간 하고 있는 고민이 수백년전 그분들의 것이랑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18세기 가장 치열하게 살다간 사람 중 하나인 박제가의 글에서 그분의 생각을 엿보려 합니다.)

 

정유각집 ()

 

11. 아이야, 너의 원수 턱 끝에 숨어 있단다.

 

수염을 뽑다가

 

28

 

아직도 마음은 어린아인데

흰 수염이 생겨나 깜짝 놀랐네.

예로부터 누구나 이와 같거니

어이해 나 홀로 탄식할거나.

그 끝은 지극히 미세하지만

복어 가시 준치보다 더 사납다네.

안타깝다 한꺼번에 희질 못한 채

뺨이 붉은 시절에 따라왔구나.

얄미워라 빛깔이 반만 변하여

모근은 순사(蓴絲)처럼 자줏빛일세.

한번 웃고 아이에게 말을 하노니

너의 원수 턱 끝에 숨어 있단다.

긴 창도 짧은 창도 아닌 무엇이

우릴 해쳐 견디지 못하게 하지.

서둘러 섭공(聶公)을 청하여 와서

남김없이 찾아서 없애야겠네.

겉으로야 업신여김 막는다 해도

속은 이미 쇠함을 잘 알고 있지.

몇 번의 여름 겨울 지나고 나면

그때의 일 더더욱 알 만하리라.

준마에 올라타 달릴 수 없고

아름다운 여인도 안지 못하리.

질긴 고기 씹지도 못하게 되고

찬 술도 마실 수가 없게 된다네.

평생토록 좋아하던 서책마저도

보려 해도 자꾸만 흐릿해지리.

점차로 후생들 피하게 되고

만시를 짓는 일 잦아지겠지.

백 년 인생 아득히 생각해 보매

실로 슬픔 가득하다 미리 말하네.

푸른 솔은 내 배꼽서 자라 나오고

금잔디 내 눈썹에 쌓여 갈 테지.

문장과 공훈이 있다 하여도

뉘 다시 공덕비에 실을 것인가.

툭 터진 마음으로 이 일 처리해

무리에게 속는 바 되지 말아야.

아내 불러 속히 떡을 차리라 하고

옷 잡혀도 조금도 의심치 않네.

신선 될 계책은 또한 성글고

해 달아맬 생각도 어리석은걸.

벼슬길 오른 지 십여 년인데

변변한 계집종의 시중도 없네.

평소에 규장(圭璋)의 기림도 없이

연하의 자태만 저버렸구나.

다행히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아

가만 앉아 남은 빛을 즐기어 보네.

황혼도 이르지 아니했는데

불 밝혀 노닒을 기약하리오.

벗 부름은 너무 멀어 그게 괴롭고

술 빚자니 너무 더뎌 또한 괴롭네.

원컨대 좋은 친구 맛좋은 술을

생각날 때 그 즉시 함께했으면.

거울 들고 한바탕 노래 부르다

노래를 끝마치고 이 시를 짓네.

 

12. 지금껏 아내의 치마 없음 누가 알리.

 

눈이 어두워져 관직을 사임하며 동료들에게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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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어지러 나무에 헛 무늬 나타나고

이따금 금가루가 어지러이 흩날린다.

게다가 잔물결에 동심원이 번져 가고

볕 받아 낙숫물이 거꾸로 떨어지듯.

어리어리 흔들흔들 이 무슨 물건인가

잡아 보면 꽃 아니요 막고 보면 모기 아닐세.

그 옛날 깨알 글씨 쓰던 일 탄식하니

모지라진 몽당붓이 한 무더기 되었다네.

내각의 문서들을 낙엽 쓸 듯하였고

십 년간 밤낮없이 교정을 보았었지.

전생에서 남은 빚이 얼마나 많았던지

이번 생에 한 글자로 한 푼 빚 갚는다오.

아니면 틀림없이 노둔한 말이 되어

날마다 채찍 맞고 3백 근을 날랐으리.

바깥에서 마구 써도 시력 잃기 충분한데

하물며 괴롭게도 오장까지 태웠다네.

고아는 봉양 못함 남 몰래 아파하니

녹 있대서 어이해 무덤 꾸밈 후히 할까.

고기도 맛이 없고 만종 녹도 가벼우니

세상의 영고성쇠 뜬구름과 같은 것을.

구구하게 다시금 임금 향한 마음 있어

알아줌에 벼슬 지위 높낮음을 안 가렸지.

이로 좇아 서성이며 또한 오래 있다 보니

어이하나 하루아침 두 눈이 흐려졌네.

내 벼슬 악공과 나란함 창피커늘

어떻게 더듬더듬 문단을 따를쏜가.

소인들은 나를 보고 출세했다 말하지만

지금껏 아내의 치마 없음 누가 알리.

높은 자취 숨어 있는 어진 선비 따르면서

남은 해를 침묵 속에 초야에 기대리라.

성군을 곁에 모심 그래도 길 있으니

월강(月講)에 참여하고 설날에 조회하리.

 

13. 갈 때는 봄날 짧다 의심을 하고 올 적엔 말 잘 달림 애석해했네.

 

화성어제에 삼가 차운하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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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엄숙하게 드높은 산길을 따라

임금 행차 일 년에 한 번씩 가네.

우러르는 마음으로 어상을 두고

보호코자 마음의 성 쌓으셨다네.

서둘러 감 하늘도 애석했는지

살풋 적셔 비에도 정이 있는 듯.

만인이 일제히 절을 올리니

강 건너 군대 동작 또렷이 뵈네.

 

2

성군 효자 동틀 무렵 길을 떠나니

봄바람 빗소리를 일으키누나.

깊은 사랑 화상으로 전하여지고

간절한 맘 국그릇에 모습 비치네.

창오(蒼梧) 들판 근처에서 말을 내려서

고요한 한강물에 배를 띄운다.

보고 느낌 신속함을 바로 알겠네

인산인해(人山人海) 모여든 사람들 보니.

 

3

우러르고 다시금 우러러봄은

우리 임금 무한히 깊은 정일세.

하룻밤 새도록 비가 내려서

이 때문에 육군 행차 묶이었다네.

왕릉은 나무들에 가리어 있고

버들잎 성벽을 둘려 있구나.

못난 신하 군복을 갖추어 입고

거둥길 하례하며 앞서 맞는다.

 

4

그 옛날 천추절(千秋節) 생각해 보니

이곳까지 하루 만에 걸음 했었지.

화상 보며 모시던 일 그리워하니

그 효성 신명조차 감동했다네.

보슬비에 척후 군사 머물게 하고

봄 깃발이 어영에 높게 걸렸다.

어진 교화 만물을 소생시키니

좋은 기운 새 성에 가득하여라.

 

5

무덤에 절 올리려 나오셔서는

사흘 밤 화성에서 묵으셨다네.

어여뻐라 저 비가 사람 붙드니

어버이 그리는 정 알 수 있겠네.

갈 때는 봄날 짧다 의심을 하고

올 적엔 말 잘 달림 애석해했네.

우리네 임금님이 효성스러워

더디더디 이 길 갔다 모두 말하네.

 

14. 머지않아 나도 곧 돌아가리니 우리 서로 마음껏 만나자꾸나.

 

 

죽은 딸의 장례식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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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중의 길 제대로 보이지 않고

뜬구름만 종일토록 어둑하구나.

아비를 불러 대던 생사의 눈물

어미 없이 남겨진 형제의 마음.

아득히 집을 멀리 떠나가서는

어두운 땅속 깊이 들어갔구나.

머지않아 나도 곧 돌아가리니

우리 서로 마음껏 만나자꾸나.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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