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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공짜 연애 스쿨

사랑과 연애의 달인

by 김민식pd 2014. 1. 19.

일요일마다 나가는 공짜 외부 특강, 오늘은 저의 또다른 스승이신 고미숙 고전 평론가 선생님을 모십니다. 선생님이 쓰신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란 책의 프롤로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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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대상이 바로 '나'다                               - 고미숙

 

"부숴 버릴 거야!" <청춘의 덫>이라는 드라마에서 여주인공 (심은하 분)이 토해 냈던 유명한 대사다. 열렬히 사랑하고 온갖 뒷바라지를 다했는데, 상대가 부잣집 딸과 눈이 맞아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나자 분기탱천하여 내뱉은 말이다. 죽이는 것도 모자라 부숴 버리겠다니. 사연이 뭐건 이 순간, 사랑은 지옥이 된다. - 이어지는 복수혈전. 그토록 착하고 예쁘기까지(!) 한 여인을 비열하게 차버렸으니, 다들 통쾌하다, 당연하다, 고 느낀다. 그와 더불어 시청자들도 마음속 깊이 아로새긴다. 나를 짓밟고 떠난 상대는 저주받아 마땅하다. 부숴 버려야 한다, 고. 심지어는 별로 희생적인 관계가 아닌 경우에도 '죽여 버리겠다'는 저주를 서슴지 않는다. 사랑과 증오의 교묘한 결탁! 기이하게도 둘 가운데 후자가 훨씬 강렬하고 매혹적이다. 그래서인가. 멜로드라마는 늘상 사랑의 기쁨보다 증오의 광기를 그리는 데 몰두한다.

 

그런데 이 복수혈전의 멜로적 공식구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하나 있다. 복수의 씨앗인 그 사랑과 헌신이 자신이 '원해서' 한 짓이라는 사실. 누가 시켜서, 혹은 강요해서 한 짓이 아니란 사실이 결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무리 심한 (?) 배신을 당했다 할지라도 애초 모든 사건이 자신으로 비롯했음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원인이 될 때, 사랑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열심히 사랑한 다음, 그 대가로 천국에 가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행위 자체가 천국인 것. 거기에는 배신과 복수 따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따라서 복수혈전이 펼쳐진다는 건 그 사랑의 원인이 내가 아니라, 상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별로 원하지 않았는데 상대의 유혹에 의해 엮인 것이라고 하는. 그리고 역시 상대한테 속아서 억지로 희생과 헌신을 강요당했다고 하는. 요컨대, 원인이 모조리 상대에게 있는 것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 사랑은 보상과 대가가 필요하다. 내가 해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보답을 받아야 한다. 희생과 복수의 공식구가 등장하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모든 원인이 상대한테 있다면, 그걸 사랑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그건 사랑이라기보다 노동이나 거래라고 해야 맞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우리시대 멜로드라마에는 사랑이 없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는 것처럼. ^^

 

이렇듯, 사람들은 사랑을 언제나 대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한마디로 대상만 잘 고르면 만사형통이라 여기는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건 대상을 잘못 골랐기 때문이고, 아직까지 사랑을 못해 본 건 '이상형'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참으로 신기한 인과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는 판에 나는 몸만 쏙! 들어가면 되는가? 실패한 다음엔 다시 몸만 쏙! 빠져나와 복수극을 펼치면 되고? 이렇게 지독한 이기주의가 또 있을까? 상대를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면, 그런 상대를 선택한 '나'라는 존재는 대체 뭔가?

 

상식적인 말이지만, 사랑 따로 대상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나와 사랑과 대상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사랑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각자 따로 존재하다 서로 플러스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노동이거나 거래지. 그러므로, 노동이나 거래가 아닌 제대로 된 사랑을 꿈꾼다면, 반드시 환기해야 한다. 사랑과 대상과 나 사이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 나아가 사랑하는 대상,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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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많이 뜨끔했어요. (드라마 피디로서도 좀 뜨끔하긴 하지만, 저 역시 복수 치정극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전 알콩달콩 로맨틱 코미디가 좋아요.) 대학 시절 연애를 꿈꾸면서 항상 그랬죠. '지금 이 순간 내가 연애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직 괜찮은 상대를 못 만났기 때문이야.'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 깨달았어요. 사랑은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는 것을. 내가 아직 성숙하지 않아서 타인을 온전히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해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 뿐이구나, 하고. 그걸 깨닫고 나니 연애가 한결 쉬워졌어요.

 

연애와 사랑의 달인, 호모 에로스. 이 책을 통해 나이 마흔 일곱에도 연애를 배웁니다. 연애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향한 지극한 사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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