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남학생에게 물었다. "왜 피디가 되고 싶으세요?"
"여자 친구가 있는데요. 제가 친구들이랑 술 먹고 노는 걸 보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요, 제가 피디 시험을 준비하면서 스터디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걸 보면 참 좋아합니다. 여자 친구에게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피디가 되고 싶습니다."
피디를 꿈꾸는 사람에게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가 있지만, 나는 이보다 더 멋진 이유를 알지 못한다.
내가 피디가 된 경위에 대해 제레미 립킨의 '노동의 종말'을 읽은 덕분이니,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서 습관 덕분이라느니, 이런 저런 얘기를 대지만 실은 남들에게 밝히지 않은 비밀스런 사연이 하나 있다.
나는 아내를 외대 통역대학원에서 만났다. 집사람은 학교 복도 끝에서 걸어오는 나를 보고 '외대라 그런가, 교환학생이 다 있네?' 했단다. (?) 나는 신입생 환영회에 갔다가 외모가 제일 마음에 드는 여학생 옆에 앉았는데 그게 지금의 아내다. 서로에 대한 첫 인상의 격차가 이렇게 크다는 건 정말 비극이다.
학창 시절, 아내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는데, 이분의 눈이 워낙 높으시고, 나의 외모 수준은 워낙 바닥인지라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날 우연히 이야기 중에 아내가 대학 시절 TV 방송반 활동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내의 외모에 반해있던 나는 당연히 이렇게 물었다.
"학교 방송반에서 아나운서를 했던 거야?"
"그런 건 아니고, 촬영이랑 연출이랑 다 해봤어요. 방송반 생활한 게 대학 시절 최고의 추억인데..."
"그렇게 재밌으면 방송사 시험을 봐서 피디를 해보지 그랬어?"
아내가 눈이 똥그래져서 되물었다. "피디 시험이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선배?"
난 몰랐다. 피디 시험이 얼마나 어려운지. 내가 겁없이 MBC PD 공채에 지원한 건 아마 경쟁률이 얼만지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아내를 향한 짝사랑에 빠져있던 나는 어리석은 희망을 품었다. '혹시 내가 피디가 되면 나의 못생긴 외모도 눈감고 사귀어주지 않을까?'
그건 아니더라. 정말 어리석은 희망일 뿐이지. 피디가 되긴 했지만, 내 못생긴 외모는 그래도 용서가 안되는지 아내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공들여 쫓아다닌 덕분에 몇년 후, 넘어오긴 했지만... (못생긴 외모도 자꾸 보면 정드나 보다. 역시, 희망은 있다!)
나는 오늘도 아내에게 남몰래 감사한다. 방송반 출신 여학생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이유 하나가 피디라는 재미난 직업을 만나는 계기기 되었으니까.
연애를 하라고 권하는 이유?
자기 계발에 있어 연애만한 동기부여가 없으니까. ^^
지난 설 연휴 동안 조카와 딸들을 데리고 말레이시아에 있는 레고랜드를 찾았다. 마님에게 물려받은 핏줄 탓인지 딸들도 눈이 높다. 아빠를 보면 늘 구박이다. '아빤 이상하게 생겼어! 외국 사람 같애.' 그럴때마다 혼자 속으로 다짐한다. '언젠가 드라마 현장에 복귀해서 연출할 때 잘생긴 남자 배우를 캐스팅해야지. 그때가서 니들이 어떻게 나오나 보자. ㅋㅋㅋ' 인생에서 동기부여는 이렇게 늘 사심에서 출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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