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데이션의 주인공인 역사심리학자 해리 셀던에 따르면, 정치 사회학과 경제학, 집단 심리학과 수학적 확률론을 토대로 인류가 가는 길, 즉 세상이 나아갈 길을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세상은 어디로 갈 것인가?’ 누구나 궁금한 문제지만, 사실 개인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나는 누구인가?’ 이다.

 

1996, 나이 서른에 MBC PD 공채에 합격했는데, 당시는 PD를 공통직군으로 뽑아 6개월의 신입사원 연수를 마친 후, 교양국, 예능국, 드라마국 셋 중에서 진로를 선택하게 했다. 나는 예능 피디와 드라마 피디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을 했다. 나는 어떤 장르에 더 잘 어울릴까? 세상을 알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자신을 아는 것이다.

 

나는 긴 호흡보다는 짧은 호흡을 더 좋아한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과학 소설을 좋아하는데, 특히 내가 즐겨 읽었던 작품들은 단편이었다. 로봇 3원칙을 소재로 쓴 단편이나,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 답을 해주는 멀티백이라는 전지전능한 컴퓨터가 나오는 단편들을 특히 좋아했다.

 

외대 통역대학원에서 영어 통역사 준비를 하던 시절에는 공부 겸 머리를 식히려고 짬짬이 아시모프의 SF 단편을 읽었다. 그러다 이 재미난 이야기, 혼자 보고 말기에 아까워서 번역을 해서 당시 나우누리’ SF 동호회에 직접 연재하기까지 했고 나중에는 아이작 아시모프 유고집 골드라는 단편선을 내기까지 했다. (당시 직접 번역한 아시모프 단편들은 필자의 블로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분쟁해결사http://free2world.tistory.com/396)

 

생각해보면 20대의 나는 욕심이 참 많았던 것 같다. 같은 시간을 투자한다면 기왕이면 더 많은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긴 장편 하나 읽느라 시간을 투자하기보다는 짧은 단편을 수 십 편 읽는 편이 시간도 효율적으로 쓰고 더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TV도 마찬가지였다. 20대를 바쁘게 보내던 내게, 50부작 대하드라마나 연속극을 볼 여유는 없었다. 연속극이란 꾸준히 봐야 재미있지, 잠깐 잠깐 들여다본 것으로는 이야기의 전체 흐름도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즐겨 본 것이 미국 시트콤이었다. 20분이면, 이야기의 연속성 없이 완결되는 에피소드 한 편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긴 호흡보다는 짧은 호흡의 사람이구나.’ 그걸 깨닫고 나는 예능국에 지원했다. 드라마보다는 짧은 호흡의 시트콤을 연출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2000년 청춘 시트콤 뉴논스톱연출로 데뷔하며 참 즐거운 세월을 보냈다. 나와 짧은 호흡의 시트콤은 궁합이 참 잘 맞는다는 생각, 역시 세상을 아는 것보다 자신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평생을 청춘 시트콤 연출가로 살고 싶었지만, 내 나이 마흔에 선택의 순간이 다시 찾아왔다. 33살 때 뉴논스톱을 만들었고, 5년이 지나 레인보우 로망스를 만들었다. ‘뉴논스톱의 세대별 시청률을 분석해보면 주시청층이 청소년, 10대 중고생들이 많았는데, ‘레인보우 로망스의 경우, 초등학생과 미취학 아동이 압도적이었다. 변화의 원인이 무엇일까? 한국에서 학생의 삶이 그만큼 각박해졌다는 뜻이었다.

 

2000년에는 저녁 7시 시청자에 중고생이 끼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저녁 먹으며 논스톱을 보고 다시 학원으로 가거나 공부방으로 향했으니까. 그런데 2000년대 후반 들어 중고생의 삶은 눈에 띄게 팍팍해졌다. 학교 파하고 편의점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운 뒤 바로 학원으로 직행하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미디어 환경도 변했다. 컴퓨터 전송 속도 개선과 모바일 기기의 등장으로 시트콤을 TV로 보는 대신 다운로드받아 보거나 DMB로 보는 아이가 많아졌다. 이러한 변화로 평일 저녁 공중파 실시간 시청률에서 10대가 차지하는 비중이 사라졌다.

 

나는 청춘 시트콤 연출이 지속가능한 작업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이 마흔에 전직을 해서 드라마 피디가 되었다. 5년이 지난 현재, 한때 방송 3사에서 저녁 7시면 경쟁적으로 편성하던 청춘 시트콤이 사라져버렸다. , 때론 내가 좋아하는 것 못지않게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구나.

 

물론 아직까지 내가 잘하는 것세상이 원하는 것을 일치시키지는 못한 터라 괴로움이 많다. 몇 해 전 야심차게 시작한 드라마가 망한 후, 실의에 빠져 폐인처럼 살았다. 그러다 문득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로 여행을 떠났다.

 

앙코르와트 유적을 보자 나의 시청률 고민은 초라하게 느껴졌다. 천 년 전 이 아름답고 웅대한 사원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은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이 도시는 폐허가 될 거라는 걸 알았을까? 이 아름다운 도시에 다시 사람들이 찾아들기까지 천 년의 세월이 흐른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절대 몰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1000년의 세월을 견디는 사원을 지은 것이 아니겠는가. , 인생이란 이렇게 허망하구나. 우리는 우리의 앞날을 절대 알 수 없구나. 그럼에도 인간의 도리는 지금 이 순간 내 손에 쥐어진 망치와 정으로 바위를 깨어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구나. 드라마의 성패와 관계없이,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영원으로 가는 길이구나. 앙코르와트 유적 앞에 서서 그런 겸허한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지난 가을에도 스페인 이탈리아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보며,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을 보며, 500년 전 그 찬란했던 문명의 발자취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안달루시아 지방을 돌아본 후, 또 궁금해졌다. 이런 아름다운 건축물을 남긴 중세 이슬람 문명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문명의 발달과 멸망에 대해 고민하던 나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단편만 좋아했던 20대 시절에는 읽지 않았던 SF 대하 사극 파운데이션’.

 

7권에 펼쳐진 이야기의 분량을 보고 질릴 수도 있는데 실은 챕터 하나하나가 완결된 이야기구조를 가진 단편 모음집이다. 짧은 호흡을 좋아하는 이나, 긴 호흡을 즐기는 독자나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형식의 소설. SF 작가로서 아이작 아시모프 이야기의 완성체가 파운데이션이 아닐까 싶다.

 

어렸을 때는 책 한 권을 읽으면 무언가 의미를 남기려고 했는데, 나이 들어보니 그런것 다 의미 없다. 독서가 좋은 진짜 이유는 책을 읽는 그 순간이 즐겁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더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그 순간 즐거울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의 덕목이라 생각한다. 책을 읽는 순간 행복한 것이 우선이다. ‘파운데이션을 읽으며 간만에 몰입의 재미에 흠뻑 빠진다.

 

중년의 SF 마니아, 다시 아시모프를 읽는다. , 전체 분량을 보니 오래오래 행복할 것 같다.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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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06 07:2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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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3.12.06 12:0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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