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아까운 책'에 원고를 실었어요. 매년 한번씩 책을 소개할 수 있는 지면이 주어진 다는 것, 책벌레로서 영광이자 기쁨입니다. 맛보기로 제 글을 올립니다. 애서가들이 꼽는 지난 한 해 아까운 책은 무엇일까? 여러분도 찾아보세요~)
나는 드라마 피디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TV가 없다. 거실 벽에는 TV 대신 책이 가득하다. PD 지망생들을 위한 진로 특강을 가면 TV를 보지 말고 그 시간에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내가 PD가 된 것도 1년에 200권씩 책을 읽은 덕분이고, PD로 즐겁게 사는 이유도 틈만 나면 책을 읽기 때문이다. 그 재미있다는 ‘1박2일’이나 ‘러닝맨’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하면 아이들의 눈이 똥그래진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술 담배 커피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이렇게 묻는다. “그럼 무슨 재미로 사나요?” 나의 답은 단순하다. “책 읽는 재미로 살지요.”
나는 삶이 힘들 때마다 책을 집어 든다. 독서량이 많다는 건 그만큼 삶이 힘들었다는 뜻이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해서 문과를 지망했는데, 아버지의 강권으로 적성에 맞지 않는 공대에 진학했다. 대학 시절 내내, 석탄채굴학이나 석유채취공학을 들었는데 수업 시간에 괴로워 죽을 뻔 했다. 그래서 강의실 뒷자리에 앉아 전공 서적 대신 스티븐 킹이나 시드니 셀던의 대중 소설을 읽었다. 기왕이면 영어 공부를 겸해서 소설을 읽자는 생각에 원서로 수 백 권의 소설을 읽었는데 그 덕에 외대 통역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삶이 우울해서 책을 읽었는데 새로운 직업의 길이 열렸으니 책은 내게 친구이자, 스승이요, 인생의 구원자다.
혼자 읽고 말기에 아까운 책을 국내에 소개하자고 시작한 일이 소설 번역이었고, 재미난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욕심에 시작한 일이 시트콤과 드라마 연출이었다. 대본을 읽을 때 느낀 재미를 화면에 충실히 재현하는 게 피디로서 나의 목표인데, 아직 공력이 부족한 탓인지 매번 좌절한다. 아무리 영상 기술과 컴퓨터 그래픽이 발전해도 머릿속에 펼쳐지는 상상력은 절대 못 따라간다.
청소년 진로 특강을 가면 학부모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 “독서하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 아이에게 어떤 책을 읽혀야하나요?”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무조건 재미난 책을 읽혀야 합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책을 읽도록 해주세요. 숙제하듯 억지로 시키면 책 읽기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집니다. 독서가 게임이나 TV 시청보다 더 재미나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해주세요.”
작년 한 해, 유난히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 중 딱 한 권만 추천하라면 가장 재미난 책을 고르고 싶다. 그래서 뽑은 책이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다.
지구적 스케일의 사건을 일본이라는 국지적 무대에서 푸는 게 일본 작가들의 특기인데, ‘제노사이드’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한 학자가 죽고 그 아들이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의문의 편지를 읽게 된다. 그 아들은 전형적인 이공계 ‘오타쿠’인데 만약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 인류를 구할 수 있는 단서라면 그가 해야 할 행동은 무엇일까? 한편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아프리카 내전에 관련해 어떤 군사 작전을 승인한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 내린 결정이라지만 가끔 그러한 결정은 이민족에 대한 전쟁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번 작전은 혹시 다른 인종에 대한 제노사이드가 아닐까? 여기 또 한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불치병을 앓는 아들의 목숨을 건지지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 건 한 아버지가 있다. 용병으로 아프리카 내전에 자원한 그가 목격하는 인종학살의 참상. 일본 이공계 대학생의 실험실, 미국 백악관의 전쟁지휘실, 아프리카 내전의 현장, 각기 다른 장소에서 세 남자의 운명이 얽히고 갈린다. 인류의 미래를 놓고.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는 어려서 영화감독을 지망하여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독립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일본 텔레비전 제작 현장에서 프로듀서로 일하다 소설가로 데뷔했다.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전개와 시각적 쾌감을 선사하는 디테일한 묘사가 그의 장기인데, 아마 오래도록 영상을 다룬 작가의 경력 덕분이 아닐까 싶다. 21세기가 아무리 영상 미디어의 시대라 해도 역시 스토리텔링의 기본은 활자다. 영화보다 더 재미난 영화감독 출신 작가의 소설, 많은 이들이 책 읽는 재미를 만끽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제노사이드'란 인종학살을 뜻한다. 소설의 표지에도 나오는 질문이다. '어째서 인간만이 자신의 종을 죽이는 것일까?'
'예를 들어 적이 인종적으로 다르며, 언어도 종교도 이데올로기도 다르게 되면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며 그만큼 죽이기 쉬워진다. 평소에도 다른 민족과 심리적인 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스스로가 소속된 민족 집단의 우월성을 믿으며 다른 민족을 열등하다고 느끼는 인간이 전쟁에서 손쉽게 변모하는 모습을 보인다. 평소에 주위를 둘러보면 그런 사람을 한둘쯤 바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싸우는 상대가 윤리적으로도 열등한, 짐승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라고 철저하게 가르쳐 두면 정의를 위한 살육이 시작된다.‘
- ‘제노사이드’ 중에서
가즈아키는 한국인 유학생을 소설 속 인물로 등장시켜 일본군의 난징 학살이나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학살 당사자인 일본의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이야기 일수 있는데, 과연 인종 학살이 일본만의 역사일까?
우리의 역사에도 학살은 있다. 노근리 양민 학살과 베트남전 양민 학살. 동맹국 군인이 주둔국가의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사건이지만, 1950년에 피해자였던 우리는 1966년에 가해자가 되었다. 1973년 월남파병이 끝난 후, 양민 학살의 기억을 갖고 돌아온 군지도부는 7년 후, 광주에서 학살을 일으켰다. 인종도 종교도 언어도 같은 동포를 상대로.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에게 총구를 겨누었을 때 진압군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까?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친구일 수 있는 사람이지만, ‘빨갱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죽이기가 쉬워지는 걸까?
2012년 1년 동안 책을 참 많이 읽었는데 그 이유는 본업인 드라마 연출에서 배제된 탓이다. MBC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하며 170일간 파업을 이끌었다는 죄목으로 검찰에서 2번의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그때마다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졌다. 파업이 끝난 후에도 정직 6개월에, 대기발령에, 교육발령까지,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나는 회사의 보복 인사로 드라마 제작현장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함께 파업을 한 동료 중 8명이 해고를 당했고, 백여 명이 아직도 징계와 인사 보복으로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신천교육대’라 불리는 MBC 아카데미에서 나와 함께 교육을 받고 있는 이들 중에는 정년퇴직을 2년 앞 둔 라디오 피디도 있고 뉴스데스크 앵커도 있는데, 누구보다 공영방송 MBC를 사랑하는 이들이 아우슈비츠의 유태인들처럼 격리 수용된 모습을 지켜보기란 쉽지만은 않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잔인해 질 수 있는 조건? 함부로 이름을 붙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이라는, 조센징이라는, 투치족이라는, 탈레반이라는, 베트콩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때문이다. 언론 자유를 외치고, 공영방송 정상화를 외친 이들에게 '종북좌파'와 '빨갱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그들을 사생활을 침해하고, 인권을 유린하고, 해고로 내모는 것이 쉬워지는 것일까?
‘제노사이드’를 읽으며 힘든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었고,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함부로 누군가를 어떤 이름으로 규정하는 일을 경계하게 되었다. 이 좋은 책을 내게 추천해 준 것은 평론가 김봉석이다. 그가 쓴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을 통해 재미난 소설을 많이 발굴했고, 그 많은 소설을 읽으며 고난에서 버티는 법도 배웠다.
‘하드보일드는 살아남은 자, 아니 살아가야만 하는 자의 서사다. 아무것도 줄 수 없다 해도, 미로를 헤매는 즐거움은 존재할 수 있다. 이 끝없는 미로의 출구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 희망만은 간절하게 남아 있기에. 그게 하드보일드의 비극적인 세계관이다. 알 수는 없지만, 믿을 수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만 한다. 나는 하드보일드가 일종의 스타일이며, 애티튜드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캐릭터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살아가는 방식으로서, 세상의 폭력에 맞서 살아남는 한 가지 방법.’
- '하드보일드는 나의 힘' 중에서
하드보일드한 세상에 희망이 있을까? 이 길의 끝에 희망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일단 살아남고 보는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짐승의 길을 선택하는 이도 있지만, 우리에게 최선은 인간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인간답게 사는 게 힘들어도 적어도 괴물은 되지 말아야지.’
원고 마감을 하루 앞둔 2013년 3월 26일, 언론인 대량 학살을 주도한 김재철 사장이 해임되었다. 공영방송 MBC의 정상화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험하고 먼 길이라도 책과 함께라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하루도 책읽기의 즐거움에 감사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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