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승태 씨를 만나게 된 건 그의 책 ‘인간의 조건’ 덕분이다. 올해 초 우연히 MBC 노조 집행부 동료에게 책을 소개받고 단숨에 다 읽었다. ‘꽃게잡이 배에서 돼지 농장까지, 대한민국 워킹 푸어 잔혹사’라는 책은 저자가 지난 5년간 우리 사회에서 가장 고된 노동 현장을 경험하고 써낸 책이다. 무척이나 우울한 이야기를 예상했지만, 사실 이 책은 최근 읽은 책 중에 가장 재미난 책이다. 돼지 농장에서 똥을 치우며, 꽃게잡이 배 위에서 통발을 쌓으며 이렇게 재미난 글을 써낸 이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 궁금증을 풀기위해 합정동 어느 카페에서 한승태 씨를 만났다.
험한 노동 현장에 위장취업해서 노가다 일로 이력을 쌓았다면 우락부락한 인상이거나 적어도 다부진 체격일거라 예상했는데, 겨우 서른 남짓 아직 앳된 표정이 남아있는 키다리 청년이었다. 책에 보면 숱한 현장에서 일 못한다고 욕도 많이 먹었다고 하는데 실제 만나보니 책상에 앉아 글공부할 선비 같은 인상이라 직장을 구할 때 어려움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제가 일자리를 찾는 곳에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꽃게잡이 배든 돼지 농장이든, 늘 일손이 부족한 곳이고, 사람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는 일터라 젊은 사람이 하겠다고만 하면 무조건 환영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대우가 좋다거나 급여를 확실하게 챙겨주는 건 아니지만요.”
대학을 나와 작가 지망생으로 살려면 좀 더 쉬운 일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험한 일을 찾아 한 걸까?
“대학 졸업하고 백수로 오래 살았는데요. 그때, 남들이 꿈꾸는 삶의 전망과 동의할 수 없었어요. 주위 친구나 어른들의 삶이 부럽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글을 쓸 수만 있다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겠다고 느꼈어요.”
요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너무 많아 ‘웃프다’는 유행어도 있지만, 이 책이야말로 ‘웃프다’의 정점을 찍는 책이다. 주인공이자 작가인 한승태 씨가 처한 현실이 암울하기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데 어떻게 그 괴로운 경험을 이렇게 재미나게 쓸 수 있었을까?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열악한 노동 현장에 관한 책이라고 관심 있는 관계자끼리만 돌려보는 ‘내부문서’처럼 쓰고 싶지는 않았어요. 평소 이런 책을 보지 않는 ‘외부인’들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글을 쓰는 게 목표였습니다.”
사람들이 욕하면서 보는 막장 연속극도 인터넷에 들어가 기획의도를 보면 ‘가족의 정과 사랑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드라마’라고 나와 있다. 기획의도 따로, 결과물 따로 나오는 드라마가 참 많은데, 신인 작가가 자신의 기획의도대로 책을 썼다니, 정말 신통방통할 따름이다.
주위의 드라마 작가 지망생 중에도 편의점이나 주유소에서 알바 뛰고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면 결국 생계를 위한 일을 하는데 지쳐 글쓰기는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승태 씨는 진도 꽃게잡이배나 아산 돼지 농장, 춘천 비닐하우스 같은 극단적인 노동 환경에서도 꿋꿋이 글을 썼다. 하루하루 버티는 게 용한 지경에서 어떻게 책까지 썼을까.
“저는 일을 하며 책을 썼다기보다 글을 썼습니다.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으면 힘들 수 있지만 하루하루 조금씩 글은 쓸 수 있거든요. 일기에 소소한 것까지 일일이 기록하는 게 버릇이에요. ‘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다. 누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들의 말도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적어두고 나중에 그 글들을 모아 엮으니 책이 되더라고요.”
‘인간의 조건’을 친한 드라마 작가에서 소개했더니, 척 보고는 ‘소설이네요?’ 하더라. 그만큼 대사가 많고 지문 설명이 알차다. 무언가 주장한다기보다 고시랑 고시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이다. 읽으면 생생하게 그림이 그려지는데 그만큼 디테일이 살아있는 묘사 덕분이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다양한 경험에 도전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저는 일을 해야만 생활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험한 일도 닥치는 대로 하는 편인데, 싫증을 잘 내는 성격 때문에 같은 일을 오래 하거나 두 번 반복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벼룩시장을 들고 다니며 구인란에서 안 해본 일을 찾지요. 해 본 일은 동그라미를 치고, 빈 칸을 찾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그라미가 꽤 많이 그려졌더라고요. 구직란을 모두 동그라미로 채우면 그걸로 책을 한 권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구직란에 동그라미를 쳐서 빙고를 완성하는 사람은 처음이다. 진도 꽃게잡이, 아산 돼지농장,춘천 비닐하우스, 당진 자동차 부품 공장 등 많은 곳을 거치며 다양한 일을 해봤는데, 그중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다.
“편의점하고 주유소 알바요.”
의외였다. 수영도 못하는 이가 캄캄한 바다 위에서 흔들리는 꽃게잡이 배 위에서 통발을 쌓는 일보다, 돼지 사육사 바닥에 쌓여가는 분뇨를 치우는 일보다, 공장 밤샘작업을 하다 드릴을 손에 갖다 대는 섬뜩한 경험보다 편의점 근무가 더 힘들다니?
“서비스업종에서 일하는 것은 24시간 근무 같아요. 감정 노동이 더 힘들거든요. 일할 때 겪은 괴로움이 집에 와서도 계속 생각나서 하루 종일 일하는 것처럼 힘들어요. 돼지 똥을 푸는 건 억울하진 않거든요. 그건 그냥 일이니까요. 하지만 편의점이나 주유소에서 일하다 손님에게 모욕을 받으면 그건 계속 머리에 남아요. 앙갚음할 수도 없으면서 분한 마음만 남아있으니 계속 집에 와서도 그 생각만 붙들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편의점 알바에겐 자유시간이 없는 셈이죠. 똥꾼은 근무시간이 끝나면 일은 끝나거든요. 점원에게 화를 내는 고객도 밖에선 점잖은 사람이라 생각해요. 다들 화가 많아 어딘가로 분출하고 싶은데 가게에서 자신이 내는 돈에는 누군가에게 화를 낼 권리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평소 서비스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일수록 버스 기사에게 욕을 하거나 식당에서 아주머니에게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들에게 욕먹고 일하느라 스트레스 받은 이들이 손님으로서 제대로 대접받고 싶은 욕심에 더 쉽게 동료 노동자에게 화를 낸다는 이 ‘불편한 진실’.
언론에서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이 참 많은데 정작 ‘불편한 진실’은 개그 프로그램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게 진짜 ‘불편한 진실’이다. 세상이 외면하고 언론에서도 다루지 않는 ‘불편한 진실’을 직접 부딪혀 겪고 그 과정을 글로 써낸 작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작년 한 해, MBC 노조가 170일간 파업하면서 조합원 여덟 명이 해고되었다. 그 와중에 195억원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해 조합 통장까지 가압류당해 조합 살림이 많이 어려웠다. 그때 농성장에 격려 방문 오신 분들이 ‘최고의 연대는 현찰이다’ 라며 성금을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운 마음뿐이다. 많은 이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MBC가 가야할 길이 아직도 멀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동지간의 최고의 연대는 좋은 책을 함께 읽는 것이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책을 통해 생각을 공유하는 게 최고의 연대니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힘든 나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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