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어른을 위한 키다리 아저씨

by 김민식pd 2013. 4. 3.

어느 분이 올리신 질문입니다.

 

"'키다리 아저씨'를 참 좋아하는데요, 어른을 위한 '키다리 아저씨' 같은 책도 있나요?"

 

성인판 '키다리 아저씨'라..... 요즘 TV에서 하는 모든 연속극이나 로맨틱 코미디가 다 키다리 아저씨의 또다른 변형이죠. '키다리 아저씨'를 좋아하신다면 '키다리 아저씨'를 한번 더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제가 하는 독서법은 이렇습니다. 좋아하는 책이 있으면 읽고 또 읽습니다. 특히 어려서 읽은 책은 나이 들어 또 읽습니다. 다시 읽으면 느낌이 또 다릅니다. 고전이나 걸작의 특징이죠. 또 봐도 또 재밌습다. 열 살 때 받은 느낌과 스무살로 만나는 책의 느낌이 또 다르답니다. 어려서 동화판 혹은 청소년을 위한 축약본 '키다리 아저씨'를 읽었다면 이제는 원전에 충실한 번역본을 찾아 읽어보세요. 느낌이 또 다를 겁니다.

 

저는 하나의 책을 여러가지 포맷으로 즐깁니다. 영어 공부를 한 뒤로는 원서로 찾아읽는 것도 즐거움이구요, 오디오북으로 듣는 것도 재미납니다. 낭독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맛이 있어요.

 

제가 몇번을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고전이 있는데요, 바로 카프카의 '변신'입니다.

'어느날 아침 어지러운 꿈속을 헤매다 눈을 뚠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의 몸이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첫 문장에서 콱 막힌 겁니다. 도대체 왜 사람이 벌레로 변한거지? 책은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방사능 변이를 일으킨 벌레에게 물린 것도 아니고, 생물 실험의 부작용도 아닙니다. 그냥 변한 거에요. 어릴 때는 이 책의 도입부가 내게는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올해 초, 산울림 고전 극장에서 낭독으로 카프카의 '변신'을 만났습니다. 낭독 공연 중 눈물이 다 나더군요. '이런 이야기였어?' 완전 깜놀이었습니다. 돌아와서 저는 책으로 다시 읽고, 카프카의 생에 대해 다시 읽고, 오디오북으로 다시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때의 티켓은 요즘 책갈피로 활용중입니다. 배경은 지금 읽고 있는 SF 걸작 소설, 엔더의 게임입니다. 곧 영화로 나온다기에 먼저 책으로 영접하는 중이지요.)

 

어린 시절 아무런 감흥이 없던 '변신'이 이제야 내 마음을 울린 것은 아마 나의 고민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년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한 후, 스스로에게 늘 묻습니다. '나는 변한 걸까?'

 

전 항상 세상에 대해 낙관적이고 사람에 대해 희망적이었습니다. 매번 새로운 직업에 도전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이 받아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요즘은.... 글쎄요... 김재철 사장을 겪어 본 후로 과연 내가 사람에 대해 여전히 희망적일 수 있을까요? MBC의 미래에 대해 여전히 낙관적일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내 삶은 왜 이렇게 진지해졌을까요?

 

고민이 많다보니 책 한 권을 읽어도 그냥 넘어가지 않더군요.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모습에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나는 나인데, 세상은 나를 벌레 취급한다.' 뭐 그런 느낌이랄까요?

 

질의응답에서 갑자기 푸념으로 바뀌었군요.

나는 변하지 않았어요. 나는 여전히 즐거움을 쫓아 사는 딴따라 피디입니다.

요즘 제가 빠져 사는 건 책읽는 즐거움, 고전을 읽는 즐거움입니다.

새로운 이야기도 좋지만, 좋아하는 이야기에 더 깊이 빠져보는 것도 독서의 색다른 즐거움이랍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