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 그것은 시간이라 생각한다. 가끔 나는 스스로에게 선물로 하루를 통째로 준다. 

 

엊그제 화요일, 책 '공짜로 즐기는 세상'의 최종 교정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지난 1년 동안 매달려온 작업인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첫 책을 낸다는 것이 기쁜 한편, 심리적 부담이 크기도 했다. 특히 파업과 원고 집필을 동시에 진행하며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최종 수정고를 마무리한 다음, '이제 내 자신에게 선물로 하루를 주자'고 생각했다. 마침 어제는 MBC 노조 창립일이라 회사 휴일이었다. (MBC는 좋은 회사라 노조 창립일도 쉰다. 물론 이건 다 1990년대에 조합의 선배들이 피로 싸운 투쟁의 산물이지만.) 지난 1년 동안 노조 집행부로 나름 많은 일을 겪었기에 하루 정도는 조합일을 쉬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루를 선물로 받았다고 생각하니, 들떠서 그런지 새벽 4시에 눈이 번쩍 떠졌다. 그래서 블로그에 일찍 글을 올렸다. 선물 받은 날에는 늦잠도 아깝다.  

 

첫 선물 - 늑대 아이

 

아침 7시반에 집을 나와 동네에 있는 메가박스 이수까지 걸어가서, 8시20분 첫 영화로 '늑대아이'를 보았다. 아침에 극장까지 산책가서 조조 영화보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나 '썸머워즈'를 워낙 좋아한 탓에 호소다 마모루 감독에 대한 충성심이 큰 편이다. 늑대 인간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애니메이션의 강점을 잘 살린 환타지이면서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마음이라는 인류 공통의 정서를 건드리는 정통 드라마였다.

 

영화가 끝나자 눈물이 줄줄 흘러 불이 켜져도 창피해서 바로 일어서지 못했다. 그덕에 자막 올라가는 걸 다 봤는데, 사실 마지막 자막이 나에게는 더 감동적이었다. 뒷줄에 앉은 중학생 아이들은 주제가가 나오는 중에도 '야, 좀 시시하다.'하면서 나가며 혼자 영화보며 울고 있는 중년의 덕후를 흘끔흘끔 보더만. '너희도 커서 부모가 되면 내 심정이 이해될거야.' '늑대아이' 꼭 보시길. 특히 영화가 끝나도 남아서 주제가를 끝까지 들어보시길. 감독이 직접 만든 노래가 정말 심금을 울린다.

 

 

 

두번째 선물 - MB의 추억

조조 영화를 보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 이번에 'MB의 추억'을 만든 김재환 감독. 예전에도 쓴 적이 있는데 김재환과 나는 96년 MBC PD 공채 동기다. 회사를 다니며 정말 기가 죽는 것은 동기들이 하나같이 잘나간다는 점이다. 드라마 '최고의 사랑' '선덕여왕'을 만든 박홍균, '해를 품은 달' '로얄패밀리'를 만든 김도훈, '베토벤 바이러스' '더 킹'을 만든 이재규, 96년에 함께 들어온 동기다. 교양국에서 '아마존의 눈물' '남극의 눈물'을 만든 김진만도 우리 동기다. 김재환 역시 교양국에서 일하다 나가서 '트루맛쇼'와 'MB의 눈물'을 만들어 '막강 96' 파워를 자랑하는 중이다. 동기들이 잘 나가는 걸 볼 때마다 느낀다. '이제 나만 잘 하면 되는구나.' ^^ 

 

 

2012/05/01 - [공짜 PD 스쿨] - 딴따라가 만든 'MB의 추억', 완전 기대된다!

 

동기 자랑으로 잠시 흘렀지만, 그 김재환 피디가 만든 'MB의 추억'이 드디어 10월 18일 개봉을 앞두고 어제 오후 2시에 기자시사회를 가졌다. (개봉일 날짜에 너무 큰 의미 두지 마시길... 발음이 좀 불손해서 그렇지, 거시기한 의도는 없었단다. ㅋㅋ) 언론시사회지만 나는 친구 빽으로, 또 블로거 기자의 자격으로 공짜로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이명박 대통령의 얼굴이 영화관 화면 가득 나오는데 이렇게 즐거울 줄 미처 몰랐다. 개봉하면 여러분도 이 신기한 체험을 반드시 해보시기 바란다.

 

 

   

블로그에 올리기도 불쾌한 이미지이지만, 내가 참는다. 친구의 영화 홍보를 위해...

 

참고로 10월 17일 유료 시사회에서는 영화가 끝나고 두 딴따라 감독의 뒷담화가 준비되고 있다.

딴따라 출신에 감히 노조 부위원장을 맡은 김민식과,

딴따라로 한국의 마이클 무어가 된 김재환의 토크 배틀.

영화 감독과의 만남이지만 영화를 씹을 거라 기대하진 마시라.

영화 주연 배우만 씹기에도 시간이 부족할듯 하니까. ㅋㅋㅋ

 

 

세번째 선물 - 슬로우 스텝

 

영화 시사회가 끝나고 나는 다시 혼자 대학로로 향했다. 저녁 연극 관람을 앞두고 3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 만화카페에 들어가 정액권을 끊었다. 평일 오후에 중년의 아저씨가 혼자 만화방에 앉아 킬킬 거리는 모습, 이게 늘 내가 꿈꾸는 중년 덕후의 일상이다. 처음에는 만화 간츠의 최신편을 보려고 갔다가 의외의 소득을 건졌다. H2의 작가 아다치 미츠루의 미공개작이다. 

 

한때 H1이라고 소개되었던 '터치'로 뜨고 난 후 연재한 만화 '슬로우 스텝'은 그동안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다. 만화방에서 아다치 미츠루의 서가를 뒤지다 의외의 발견을 했다. 아다치의 초기작에 속하는데 최근에 크로스게임을 보며 약간 식상하다고 느낀 사람이라면 '슬로우 스텝'을 권해본다. 작가 특유의 개그 감각과 달달한 로망스를 좋아하는 이라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일부러 마지막 권은 안 읽고 남겨두고 왔다. 미츠루의 만화는 한번에 다 보기 아까우니까.   

 

마지막 선물 - 작업의 정석

 

7시 무렵 만화방에서 나와 혼자 라볶기를 하나 먹고 저녁 8시에 연극 공연을 보러 갔다. 인터파크에서 항공권을 몇 번 샀더니 연극관람권이 한 장 날아왔다. 보통 연극표를 한 장 보내는 이벤트의 목적은, 혼자 보러오기 민망할테니 한 장은 사서 오라는 뜻이다. 즉 2장을 한 장 가격에 보는 50% 할인 이벤트인 셈인데, 나같이 짠돌이에 뻔뻔한 고객에게는 이런 전법 안 먹힌다. 그냥 나는 혼자 보러간다.

 

영화나 만화는 혼자 봐도 연극은 혼자 보기 정말 민망하다. 주로 커플 관객이 많으니까. 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한다. '드라마 피디인 내게 배우의 실물 연기를 볼 수 있는 연극 관람은 일의 연장이야.' 다 떠나서 공짜표를 날릴 수는 없잖아? '작업의 정석'은 전형적인 데이트용 로맨틱 코미디였는데, 중년의 아저씨가 혼자 보려니 좀 변태같아 보여 민망하긴 했다. '저 아저씨 저 나이에 작업 비법 전수 받으러 온 거야?' 흉봐도 할 수 없다. 난 공짜라면 양잿물도 들이킬 인간이니까. 

 

어제 하루, 스스로에게 주는 종합선물셋트처럼 알찬 하루였다. 그러고도 비용은 토탈 만원! 조조 영화 5천원, 만화방 3시간 정액권 5천원. 으흐흐... 짠돌이 덕후의 가을은 이렇게 여물어가는구나~~~

 

   

 

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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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정현 2012.10.11 14: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되실거예요 근데 이미 잘하고 계신데 ㅋ

  2. 신정현 2012.10.11 15: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되실거예요 근데 이미 잘하고 계신데 ㅋ

  3. 임현아 2012.10.11 18: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혹시 이토준지만화 읽어보셨어요? 전 공포만화를 좋아해 이토준지말고 다른작가 공포만화5권 소장중..ㅋㅋ

  4. 나비오 2012.10.12 01: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MB추억 기대되네요 ㅋ

  5. 영혼울림 2012.10.13 09:4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무척 불쾌했지만, 참아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