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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지랄 총량의 법칙

by 김민식pd 2012. 8. 31.

목감기에 걸려서 일주일째 고생하고 있다. 보통은 감기에 걸리면 한 며칠 푹 쉬면 금방 낫는데, 이번에는 독한 놈한테 걸렸는지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목이 콱 잠겨서 말하기가 힘들다. 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인데 말을 못하니 아주 죽을 맛이다. 더 힘든 건 코가 막혀 누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다는 거다. 고개를 눕힐 수가 없어 쇼파에 비스듬이 누워잔다. 그렇게 밤을 새니 아침에 아버지가 보고 놀라신다. "너 요즘 회사에서 무슨 일 있냐? 왜 잠을 못 자냐?"

 

살면서 아버지에게 거짓말 한 적이 별로 없는데 올해 초 아버지 몰래 노조 간부한 게 딱 걸렸다. 법원에서 온 집달리가 두툼한 가압류영장을 들고 문을 두들기고, 구속영장이 나와 경찰서 유치장에 끌려가는 아들 사진을 신문에서 보고, 그런 일을 겪으신 후 아버지는 매일 내 안색을 살피신다. 저 놈이 또 뭔가 속인게 아닌가, 또 어디가서 사고치는 거 아닌가, 아버지는 하루 하루 노심초사다.

 

MBC 다니는 아들이 아버지에게는 항상 큰 자랑이었다. 예전에 논스톱할 때 일이다. 평소 연락이 없는 아버지가 웬일로 녹화중에 전화를 하셔서 놀라 받았더니 웬 여중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논스톱 피디 맞아요?" 아버지가 식당에서 논스톱을 보다 저거 만든 피디가 아들이라고 자랑을 하셨단다. 최근까지도 아버지는 노인정에 갈 때마다 피디 아들 자랑을 하셨다. '그 놈이 글쎄 평생 담배는 입에도 안 대고, 술도 안 마시고, 도박은 일절 하지를 않는다우.'

 

그런 아들이 올해는 사고를 세게 쳤다. 아버지가 평소 빨갱이들 집단이라 생각하는 노조에 들어가 부위원장이라는 직을 맡고 6개월간 파업을 했으니. 지금도 아버지는 일만 하는 순진한 아들이 친구 잘 못 사귄 탓이라 생각하신다.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친구들이 걱정을 하신단다. "대기발령 받은 내조의 여왕 피디가 아들 맞지?" 하도 자랑을 해둔 터라 빼도 박고 못한다. 그 분들은 이제 열심히 사는 아들들을 보고 흐뭇해하시겠구나. '적어도 우리 아들은 파업은 안하는데 말이야, 김영감 안 됐어.' 

 

김두식 교수의 책을 보면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평생 떨어야 할 지랄이 있는데, 어린 시절에 사고치는 아이는 평생 지랄을 어려서 떨고 어른이 되면 정신을 차리고, 얌전하던 사람이 갑자기 나이들어 사고치는 경우는 죽기 전에 지랄을 떨고 가야 하니 그런단다. 나도 올 한 해 내게 주어진 지랄 총량을 채우려고 그렇게 난리를 쳤나보다. 

 

큰 딸 민지가 뽀뽀할 때마다 턱에 수염이 까끌까끌해서 싫다고 수염을 기르라고 했다. 그래서 민지가 와 있는 동안 3주간 수염을 길렀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난리가 났다. 저 놈이 회사 잘리려고 작정을 했구나. '아버지, 어차피 정직인데요, 뭘. 이럴때 아니면 언제 수염 길러보나요.' 아버지 말씀, "김재철이 너 그 꼴 보면 얼마나 못마땅하겠냐. 저게 사장한테 반항하려고 그러네 그럴거 아냐." 아니에요, 아버지. 제게 주어진 지랄을 마저 떨려고 그러는게에요.

 

 

 

결국 수염 기르는 걸 포기했다. 정작 수염을 길렀더니, 민지가, "아빠, 이상해. 도로 깎아." 하기에, 다음날 바로 깎았다. 아버지는 멀끔해진 나를 보고, 당신 말씀이 아직은 먹힌다고 생각하신다. 아버지 말은 안 듣고 자식 말은 듣는다. 이게 아직 철이 덜 든 탓일까?  

 

물러갈 기미가 없는 감기를 보며, 몸에 병없기를 바라지 말라는 보왕삼매론을 생각한다.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고 탐욕이 생겨나면

마침내 파계하여 도에서 물러나게 되느니라.

몸에 병이 없으면 과욕을 하게 되고 과욕은 계율을 깬다.

계율을 깬다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기본선을 깨뜨리게 되는 것이다.

병의 인연을 살펴서 병의 성품이 공한 것을 알면 병이 나를 어지럽히지 못한다.

설령 병이 있다 하더라도 나를 어지럽히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병에 구애받지 않음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김재철 사장으로 말미암아 다시 수양을 시작했고, 감기로 말미암아 평소의 건강에 감사한 마음이 새록새록 돋는다. 건강을 자부하며 잠시 건강관리에 소홀했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6개월의 파업 덕에 매월 자동으로 들어오는 월급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되겠지. 지금의 불통 대통령을 말미암아 돌아가신 어떤 분을 그리워하게 되듯이. 왜 나는 항상 잃고난 다음에야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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