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방법

by 김민식pd 2026. 1. 26.

어려서 저는 라디오를 참 좋아했어요. 아버지가 엄하셔서 TV를 못보게 하셨거든요. 그래서 저는 방에서 자는 척 이불 속에 숨어서 조그마한 라디오로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2가지, 이야기와 음악이 나왔어요. 그 시절, 이문세와 이종환 아저씨의 입담은 어찌나 재미있는지, 또 초대 가수들의 노래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어른이 되면서 라디오와는 조금씩 멀어졌어요. 사람들이 라디오를 가장 즐겨듣는 공간은 자동차인데요. 저는 차를 타지 않고 전철을 이용하거든요. 가끔 버스에 타면 기사님들이 들으시는 라디오를 같이 듣지요.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시대, 스트리밍의 시대에 라디오는 사양산업이 되었을까요? 라디오 산업이 현재 맞이하는 위기는 어쩌면 재도약을 위한 기회가 아닐까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책이 있습니다.

<라디오 위기에서 기회로> (임재윤 / 커뮤니케이션북스)

이 책의 저자는 제가 참 좋아하는 MBC 후배입니다. 2012년에 MBC 파업을 할 때, 어떻게 하면 우리 싸움의 의미를 시청자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팟캐스트를 만들었어요. 당시는 <나는 꼼수다> 팟캐스트의 인기가 대단했거든요. 짝퉁 나꼼수를 만들자고 했을 때, 라디오 부문 조합원 중에서 연출을 모셔왔어요. MBC 노조가 싸울 때 참 좋은 건요. 각 부문에서 최고의 역량을 가진 조합원이 전투에 합류한다는 겁니다. <서늘한 간담회>라는 파업 홍보 팟캐스트를 만든 연출이 이 책을 쓴 임재윤 피디입니다.

저자는 25년 전 라디오 PD로 방송사에 입사, 10여 년의 프로그램 제작 업무를 거치는 동안 라디오 스트리밍 위젯(MBC mini)을 기획한 것을 계기로 미디어 플랫폼 비즈니스에 처음 발을 들였어요. 사반세기 동안 한국 라디오의 녹을 먹었던 사람의 무거운 책임감으로 이 책을 썼다고요. 책에서 저자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라디오 강국들의 산업 진화 노력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오디오 미디어에 구조적 영향을 끼칠 이슈들을 통섭적으로 제시하여 라디오 산업의 새로운 길을 모색합니다. 라디오의 종말을 말하기 전에, 라디오를 재정의해야 하자고요. 

‘하던 대로 열심히 했는데 내 주변 환경이 바뀌어 위기에 빠졌다면, 그 위기 탈출의 출발점은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라디오의 역사는 위기 극복의 역사입니다. 1950년대 초 텔레비전이라는 가정용 시청각 미디어가 나왔어요. 청각 매체인 라디오는 가정의 중심에서 순식간에 밀려났지요. 이때 라디오 방송사들은 ‘이동 중 듣는 개인 매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냈습니다. 진공관 대신 트랜지스터를 채택해 주머니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작고 가벼운 휴대용 라디오를 내놓았고, 자동차 대시보드에 라디오를 장착해 ‘드라이브 타임’이라는 황금 시간대를 창출한 거죠. TV 드라마에 밀려난 라디오 드라마는 버려요. 대신 짧고 반복성 있는 Top 40 음악 포맷과 DJ의 빠른 입담으로 콘텐츠 형식을 완전히 재구성합니다. 가정에서 TV와 경쟁하는 대신 야외에서 라디오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린 덕분에 1960년대 오히려 청취 시간을 회복합니다. 


1970년대 말 다시 위기가 찾아와요. ‘좋아하는 곡만 골라 듣는 자유로움’을 내세운 워크맨이 등장한 거죠. 이제는 광고를 듣는 대신, 내가 좋아하는 노래만 반복해서 들을 수 있어요. 이제 라디오는 역할분담을 합니다. 고음질이 가능한 FM과 잡음이 불가피한 AM로 영역을 나눠서 AM은 말 중심의 뉴스·실시간 논평·토크쇼·스포츠에 집중하고, FM은 DJ 음악 프로그램을 강화합니다. 또 워크맨을 경쟁 상대로만 보지 않고 라디오를 녹음해 만든 믹스 테이프 문화를 장려해 공생 관계를 맺습니다. 저도 그 시절에 주말이면 금주의 인기가요 시간을 기다려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녹음 버튼을 눌렀어요. 카셋트 플레이어와 라디오는 이렇게 공생 관계가 된 거죠. 라디오는 매번 위기를 맞을 때마다 기술·플랫폼·사용 맥락·비즈니스 모델을 재정의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바꿔 왔습니다.

위기가 찾아오면 내 업의 본질을 고민합니다. 20대에 찾은 나만의 답이 있어요. 문제 해결에 대한 답은 언제나 책 속에 있더라고요. 책은 도서관에 가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문제가 생기면 도서관부터 찾습니다. 책을 읽으며, 위기를 분석하고, 나의 업의 본질을 고민합니다. 

인생이 재미있는 건요. 위기는 항상 새로운 기회가 되어준다는 거죠. 사람이 잘 살 때는 변화를 모색하지 않습니다. 변화는 낯설고 무서운 것이거든요. 위기가 닥쳐야만 사람은 변화를 선택합니다. 라디오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위기는 언제 올까요? 기존의 방식이 주는 편안함에 매몰되어 있을 때입니다. 동네 구멍가게나 식당과 달리 라디오 산업은 진입장벽이 높아요. 새로운 경쟁자가 들어가는 게 쉽지 않은 구죠지요. 그래서 안주하기 쉬운데 그러다 보니 새로운 기술의 발전이 바로 시장을 위협하게 됩니다.



책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

“미래는 성공 확률이 높은 모델을 그려 놓고 그 예측이 맞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원하는 미래는 일말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보니 퀸의 노래, <라디오 가가>도 떠오르고, 이순신 장군의 말씀,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는 말도 떠오릅니다. 아직 라디오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해볼 만하다는 출사표로 읽히는 책입니다.

직업인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어요. 자신이 녹을 먹고 살아온 업의 세계를 위해 참언과 진언을 내놓았네요. 같은 방송사 밥을 먹었지만, 과연 나는 이렇게 치열하게 조직과 산업을 위해 고민한 적이 있었나 부끄럽습니다. 시트콤의 몰락, 공중파 드라마의 침체에 대해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손 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방송계를 떠나는 선택으로 이어졌지요.

라디오 관계자들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고 함께 해법을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저자의 마지막 당부로 글을 마무리합니다.

‘변화된 상황으로 위기를 맞았다면 나도 변해야 산다. 

어제의 강점에 매달리지 말고, 무엇이 오늘의 내 강점이 될 수 있을지 빨리 파악해서 나를 재정의하자는 주장으로 책을 시작했다. 어떻게 재정의할지 고민하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하나둘 모아 보니 어느새 바구니를 채웠다. 이제 나보다 더 젊고, 의욕 넘치고, 새로운 생각을 뿜어낼 수 있는 라디오 업계 동료 선후배들이 ‘라디오를 재정의하는 각자의 답’을 찾아 주시길 기대하고 부탁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