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24년을 다닌 MBC에는 전설적인 인물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중 하나는 제 입사 동기인 이동희 피디입니다. 일란성 쌍둥이 자매인 이동애 기자랑 MBC에 1년의 시차를 두고 함께 입사해 평생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어요. 어느새 직장 경력 30년이 다 되어가는 두 자매가 일에 대해 책을 썼는데, 제목이 얄궂어요.
<집에 가고 싶다> (이동희, 이동애/ 말하는 나무)
그렇죠. 출근하면 누구나 집에 가고 싶지요. 직장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글이 나오는데요. 사람은 책을 왜 읽을까요? 저는 세상을 보는 다른 관점을 접하기 위해 읽습니다. 이 책은 닮은꼴 쌍둥이 저자가 기자와 피디라는 다른 직업의 세계를 통해 바라본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같은 회사를 수십 년을 다닌 동기의 삶을 책으로 접하는 게 재미있네요.
얼마 전에 자다가 꿈을 꿨어요. 회사 사장님이 불러서 지난 1주일 동안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적어내라고 하더군요. 거기에 다음 주 업무 계획도 써내라는 거예요. 갑자기 난감했어요. 외부활동 신고도 해야 하나? 도서관 강의 가기로 했는데, 혹시라도 안 된다고 하면 어떡하지? 이미 강연 신청을 받기 시작했을 텐데... 못간다고 하면 사서 선생님이 난감할텐데... 아, 그런데 나는 명퇴를 했는데, 왜 사장이 갑자기 부른 거지? 하다가 순간... 에이, 꿈이구나. 하면서 깼어요. 별 개꿈이 다 있네요.
실은 회사 생활 말년에는 저게 큰 스트레스였어요. 제가 책을 쓰고 강연을 다니는 것에 대해 회사에서 고깝게 보는 시선이 있었거든요. 드라마 연출을 시키지 않을 거면, 퇴근 후에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냥 둬야 하는 거 아닌가? 무엇보다 책을 쓰고 강연을 하는 게 너무 즐거운데 이걸 회사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그만둬야 하나? 그런 고민이 컸어요.
저자들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회사는 가장 활력이 넘치는 시기에 우리의 인생을 투자하는 대상이기에 몸담고 있는 동안은
조직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생활하는 것이 좋다. 회사를 탐구하고 적절하게 활용해야 한다. 회사를 우습게 생각하면 안 된다. 배울 수 있을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우리 자매는 회사에 들어와서 복사하는 법, 팩스 보내는 법을 배웠다. 회사 업무를 하면서 생활지능이 높아졌다. 섭외 전화를 하는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 커리어를 쌓아가며 실적을 만들어내고 성과를 내기 시작하는 연차가 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성과는 과연 누구의 것일까?’
저는 MBC를 정말 좋아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내가 회사를 아무리 사랑해도, 회사가 나를 온전히 사랑해줄 수는 없다는 것. 밤잠 줄여가며 시트콤을 만들어도 그 결과물은 내 것이 아니라 회사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내 것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출퇴근을 반복하며 매일매일의 크고 작은 직장 내 전투에 참전하며 얻어낸 성공과 실패의 경험과 노하우들. 이런 것들이 진짜 내게 남는 것 같다. 그래서 회사 생활에서 목표로 삼고 해야 할 것은 성공이 아니다. 무수히 많은 시도다.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쌓은
성공과 실패의 노하우다. 이런 경험들이 결국 나만의 자산이 되는 것 아닐까.’
저는 1996년에 입사해서 예능과 드라마를 오가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었어요.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내가 만드는 콘텐츠는 혼자서 만들 수 없어요. 작가, 출연자, 촬영진 수많은 전문가들의 노력이 더해져야 가능하죠. 또 회사에서 기회를 주지 않으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나만의 자산을 만들고 싶었어요. 온라인에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결과물을 쌓아 올려보자. 그런 생각에 2010년에 블로그를 만들고 2020년에 명퇴할 때까지 10년 동안 매일 한 편씩 글을 썼어요. 초반에는 일일 조회수가 50회도 되지 않았어요. 만약 내가 전업 블로거였다면 아마 6개월 안에 좌절하고 포기했을 지도 몰라요. MBC라는 든든한 뒷배가 있으니 새로운 도전도 할 수 있었던 거죠. 저는 우리가 회사를 다니며 얻는 것은 월급과 경험이라 생각해요. 좋은 경험으로 나라는 사람의 브랜드를 쌓아가는 것, 그게 직장이 주는 최고의 자산입니다. 어떤 경험이 좋은 경험일까요?
이동애 기자가 일본에서 3년간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무렵, 회사에 복귀하면 어떤 일을 맡게 될지 몰라 살짝 불안했답니다. 어느 날 귀임 인사를 하러 대사관에 들렀더니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대요. “돌아가면 꽃길만 걸으려 애쓰지 말고, 자갈밭에서도 굴러보세요. 꽃길은 누구나 원하는 길이라 경쟁이 치열하지만, 자갈밭에선 대부분 의욕이 없어서, 조금만 의욕을 가져도 빛날 수 있어요.”
제겐 2011년에 찾아온 노조 집행부 일이 그랬어요. 내 인생의 자갈밭이었지요. 드라마 피디로 계속 꽃길을 걸으려다 살짝 한걸음 옆으로 디뎠다가 자갈밭에서 한참 굴렀어요. 그런데 그 경력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요. 다른 피디들이 작가 만나고 제작사 만나고 드라마국 임원의 눈치를 살피며 편성 따려고 할 때, 나는 사장 물러가라고 시위를 하고, 송출실로 쫓겨나 책을 읽고 글을 썼습니다. 드라마를 만드는 피디는 많아도 책을 쓰는 피디는 드물어요. 그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어요. 우리는 꽃길만 걸으려 하지만 때로는 자갈밭에서 진짜 나의 길을 찾을 수도 있어요.
이동희 PD가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추신수 선수의 미국 생활을 봤는데요. 가족들이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추 선수의 큰아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기 힘들다고 혼자 방을 쓰는 문제를 상의했어요. 아빠 추신수는 그러면 안된다고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혼자 쓰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왜 그런지 알려줄까? 그 애들하고도 맞춰서 살아야 되니까……. 아빠, 미국에서 야구 시작할 때, 말도 안 통하지, 대만 사람, 일본 사람,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섞여 있고, 백인도 있고 흑인도 있었어. 그런 사람들에게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해. 사람들과 잘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해. 살면서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건 많이 없어.”
추신수 선수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는 것이 인생의 필수 능력’이라는 것인데요. 물론 인생에서 모든 사람과 다 잘 지낼 필요는 없습니다. 살다가 악당을 만날 때도 있어요. 내 삶의 전환점은 바로 그 순간입니다. 첫 직장에서 후배인 저를 심하게 갈구는 상사를 만났어요. 그 덕분에 영업직을 그만두고 통역사로 이직을 준비하게 되었어요.

MBC는 참 좋은 회사에요. 그런데도 젊은 나이에 회사를 박차고 나오는 후배가 있답니다. 한 후배가 사표를 내고 짐 정리를 하려고 회사에 갔을 때 다들 덕담을 하지요. “잘했다.” “응원한다.” “너의 용기가 부럽다.” 그중 한 선배가 조용히 물어봅니다. “누가 싫어서 그만두는 거니?” 일을 하는 건 돈이 좋거나, 일이 좋거나, 사람이 좋거나, 셋 중 하나만 좋아도 하는데요. 일을 때려치우는 건 백발백중 사람 때문입니다. 견디기 힘든 사람이 있으면 일을 그만두게 되지요. 나도 그랬어요. 떠나는 마당에 뒷담화를 할 수 없어 우물쭈물하자 그 선배가 이렇게 말해요.
“그 사람에게 고맙다고 해라. 인생에서 경로를 바꾸고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건 빌런이다. 네가 만났던 빌런이 너의 새로운 출발을 부추기는 뜻밖의 역할을 한 거다.”
빌런을 만났을 때 선택지는 둘 중 하나입니다. 도망치거나, 싸우거나. 둘 다 참 어렵지요. 그럴 때 저는 세 번째 경로를 선택합니다.
‘스티브 매그니스는 『강인함의 힘』에서 아주 사소한 행동이라도 자신이 선택권을 가진 일을 꾸준히 하다 보면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인생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느낌이 들 때 사람은 절망에 빠지기 쉽다. ‘해서 뭐 해, 하지 말자’라고 포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 법을 새로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희망 근육을 쓰는 훈련을 하려면 멈추지 말고 뭔가를 지속해야 한다. 자신이 상황을 통제한다는 느낌, 자신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면 충분하다.”
저는 회사 생활이 힘들면 새로운 루틴을 하나 만듭니다. 94년도에 영업사원으로 일할 때는 퇴근하고 통역대학원 입시반을 다니는 루틴을 만들었고요. 2012년 이후 피디 생활이 힘들 때는 매일 아침 블로그에 글을 썼어요. 2020년 명퇴한 후에는 매일 아침 3시간씩 걸으며 흐트러지는 일상을 다잡았어요.
책을 읽고 든 생각. 회사에 가고 싶어졌어요. 이 책을 읽고 나니 저자들처럼 멋진 선배가 있는 회사에 가고 싶네요. 좋은 선배들과 함께 일하며, 일과 인생의 즐거움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 회사나 선배를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면? 이런 멋진 인생 선배의 책을 만나는 것 또한 행운입니다. 책을 읽는다면, 여러분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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