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세대> 두 번째 리뷰입니다. 청소년 진로 특강을 많이 다니는 입장에서 제가 공부해야 할 대목이 많아 여러 편의 리뷰를 쓰면서 책에서 배운 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스마트폰 등의 디지털 기기는 너무 재미있어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화면에 기반을 두지 않는 형태의 경험에 대한 관심을 감소시키거든요.
아이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인플루언서의 쇼츠 영상을 보는 건 즐겁지만, 학교에서 하는 진로 특강은 흥미를 느끼지 못해요. 선택권도 없고 길고 지루하거든요. 그런데요, 쇼츠 영상이 주는 자극과 비교하면 세상 그 어떤 경험도 당해내지를 못합니다. (절대 제가 강의력이 딸려서 그런 게 아니라고 위로하고 싶네요. ㅠㅠ 저자는 탁월한 비유를 합니다.)
‘스마트폰은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와 같다. 뻐꾸기 알은 다른 새의 알들보다 먼저 부화한다. 알을 깨고 나온 새끼 뻐꾸기는 먹이를 독차지하기 위해 즉각 나머지 알들을 모두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데, 그래도 어미 새는 아무 의심 없이 먹이를 물어다주면서 뻐꾸기를 자기 새끼인 양 키운다. 이와 비슷하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이나 비디오게임 콘솔이 아이의 삶에 침투하면, 나머지 활동을 대부분 혹은 적어도 일부를 밀어낸다. 아이는 화면에 홀려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손가락 하나만 빼고) 매일 많은 시간을 보내며, 화면 밖에 있는 것은 모두 무시한다.(물론 이것은 부모도 마찬가지일 수 있어서 가족들이 모두 ‘함께 홀로’ 앉은 채 지낸다.)’
<불안 세대 : 디지털 세계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가> (조너선 하이트 지음, 이충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이 뻐꾸기가 아이들의 삶에 끼치는 네 가지 해악이 있습니다. 사회적 박탈, 수면 박탈, 주의 분산, 중독.
먼저, 사회적 박탈.
스마트폰이 생긴 후로 아이들이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급속도로 줄어들었습니다. 문제는 친구와 함께 있는 시간에도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는 친구와 함께 지내는 시간의 질을 훼손하기 십상입니다. 스마트폰은 우리의 주의를 너무나도 강력하게 사로잡기에, 호주머니 속에서 0.1초만 진동을 해도 많은 사람은 혹시 중요한 정보라도 있을까 봐 대면 대화를 중단합니다. 굳이 상대에게 대화를 잠시 멈추어도 되냐고 양해를 구하지도 않아요, 그저 휴대폰을 꺼내 그것을 들여다보는 데요. 그러면 상대방은 ‘나는 최신 알림보다 덜 중요한 존재구나!’라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제가 유난히 멘탈이 약한 탓일까요? 저는 강의를 듣는 이가 강의 도중에 휴대폰을 꺼내어 보면, 비슷한 느낌을 받습니다. ‘아,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별로 재미가 없거나, 저 사람의 삶에 의미가 없나 보다.’ 십여 년 동안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는 이게 무척이나 뼈아픈 자각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무시를 당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당신이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에 대한 감각을 발달시키려고 노력하는 십대라고 상상해보라. 그런데 만나는 사람마다 간접적으로 “너는 내 휴대폰에 있는 사람들만큼 중요하지 않아.”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그래서 저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약속이 있어 사람을 만날 때는 스마트폰을 멀리 치워두고 알람을 꺼둡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당신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거든요.
두 번째, 수면 박탈.
스마트폰 속에 재미난 게 너무나 많지만 집중해서 볼 수 있는 시간은 한정적입니다. 학교 수업이나 학원 시간에는 집중해서 휴대폰을 보기 어려워요. 길을 걸어다닐 때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가장 쉽게 찾아내는 시간은 바로 잠들기 직전입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 자는 시간이 늦춰지는데요. 문제는 청소년들은 잠자는 시간이 늦어져도 등교 시간에 맞춰 일찍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늦잠을 잘 수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대다수 십대는 뇌와 신체에 필요한 것보다 더 적은 잠을 잡니다.
‘이것은 안타까운 현실인데, 학교와 인생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려면 잠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뇌가 사춘기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재배선되는 사춘기 동안에는 특히 그렇다. 잠이 모자란 십대는 잠을 충분히 잔 십대에 비해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진다. 그에 따라 학업 능력과 성적도 떨어진다. 반응 시간과 의사 결정, 운동 능력도 지장을 받는데, 그 결과로 사고 위험이 높아진다. 하루 종일 짜증과 불안 수준이 더 높아지고, 그래서 대인관계에도 문제가 생긴다. 만약 수면 박탈이 충분히 오래 지속되면, 다른 생리적 계들도 교란되어 체중 감소, 면역력 저하를 비롯해 여러 가지 건강 문제가 생긴다.’
세 번째, 주의 분산.
커트 보니것이 쓴 단편 소설 <해리슨 버저론>의 배경 무대는 초평등 사회인 미래의 미국입니다. 평등을 과도하게 추구한 나머지 이 사회에서는 수정 헌법으로 인해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보다 더 똑똑하거나 잘생기거나 신체적 능력이 탁월해서는 안 됩니다. 평등 유지 관리국 요원들이 능력과 결과의 평등을 실현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요. IQ가 높은 사람에게는 20초마다 한 번씩 지속적인 사고를 방해하도록 설계되어 다양한 소음이 시끄럽게 울리는 이어폰을 착용하게 합니다. 그렇게 사람의 기능적 지능을 평균적인 시민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거죠.
여러분은 지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전에는 암기력이 뛰어난 사람을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어요. 이제 암기력은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정보를 암기하는 것보다 검색으로 찾아내는 게 더 편하고 정확하거든요. 지능이란 ‘정보를 취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인데요. 이런 능력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집중력입니다.
저는 앞으로 사람의 지능은 집중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주의는 매력적인 옆길들이 손짓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 가지 과제, 한 가지 생각, 한 가지 정신적 길에 집중하기 위해 내리는 선택입니다. 그런 선택을 내리는 데 실패하고 자주 옆길로 새면, 우리는 “혼란스럽고 멍하고 산만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지능이 높은 사람은 집중력이 강한 사람이고 지능이 낮은 사람은 이제 그 반대의 상태를 뜻하게 될 겁니다. 문제는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을 때에도, 단지 휴대폰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고 능력에 손상을 입는다는 거죠.
‘한 연구에서는 대학생들을 실험실로 부른 뒤 무작위로 ① 실험실에 들어오기 전에 가방과 휴대폰을 별도의 보관실에 두고 온 집단, ② 휴대폰을 호주머니나 가방에 넣고 온 집단, ③ 휴대폰을 자기 옆 책상 위에 올려놓은 집단으로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문자열을 기억하는 동시에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유동성 지능과 작업 기억 능력을 평가하는 과제를 내주었다. 결과는 휴대폰을 다른 곳에 놓고 온 집단의 성적이 가장 높았고, 휴대폰을 눈에 보이는 곳에 둔 집단의 성적이 가장 낮았으며, 호주머니나 가방에 휴대폰을 넣어둔 집단의 성적은 그 중간이었다.’
네, 스마트폰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집중력은 떨어집니다. 하루에 한 시간, 공부나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을 만들고 싶다면 스마트폰을 치워보세요. 이제 사람의 지능은 집중력으로 좌우됩니다.
네 번째, 중독.
우리는 무엇에 중독될까요? 사람은 자연선택과 성선택을 통해 진화했습니다. 즉,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위를 할 때마다 학습에 관련된 특정 뇌 회로가 약간의 도파민(주로 즐거움과 통증 느낌에 중심적 역할을 하는 신경 전달 물질)을 분비하게 합니다. 도파민이 분비되면 기분이 좋아져요. 인터넷에 올라오는 인기 영상 중 먹방과 야동이 많은 이유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그게 우리의 생존과 번식이라는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지요.
수렵채집 시절에는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은 한정적이었어요, 매력적인 이성을 만날 확률도 지극히 낮았을 겁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경제가 발달했지만, 여전히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은 한정적이고요, 연애에 쓸 수 있는 자원도 한정적입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리고, 엄청나게 많은 양의 음식을 폭식하면서도 우리에게 대리만족을 안겨주는 먹방이 나왔어요. 매력적인 이성들의 자극적인 이미지가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고요. 이제 우리는 스마트폰이 주는 도파민에 중독되어 갑니다.
작년에 제가 소개한 책이 있지요. <도파민 네이션>. 스탠퍼드대학교의 중독 연구자 애나 렘키가 쓴 책인데요. 다양한 약물 중독과 행동 중독(도박, 쇼핑, 섹스 중독 같은)을 치료하던 저자는 2010년대에 십대 디지털 중독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이 점점 많아졌어요. 헤로인이나 코카인에 중독된 사람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활동에 중독된 이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활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즐거워하지 않았다.”고요. 그 이유는 뇌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장기간 도파민 수치가 높은 상태에 적응하기 때문이지요.
‘렘키는 “스마트폰은 인터넷에 연결된 세대에게 디지털 도파민을 하루 24시간씩 일주일 내내 공급하는 현대판 피하 주사기이다.”라고 썼다. 이 은유는 놀이 기반 아동기에서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로의 전환이 왜 그토록 파괴적인지, 그리고 이 위기가 2010년대 초반에 왜 그토록 갑자기 나타났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밀레니얼 세대 청소년은 집에 있는 컴퓨터로 온갖 종류의 중독 활동에 접근했고, 그중 일부는 중독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니는 모든 곳에 컴퓨터를 갖고 갈 수는 없었다. 그런데 아동기 대재편 이후에 다음 세대의 청소년은 그럴 수 있었고, 그렇게 했다.
스마트폰으로의 전환이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을 보려면, 수면 박탈 상태로 불안하고 과민한 학생이 학교에서 친구들과 상호 작용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상호 작용이 제대로 일어날 리가 없는데, 학교 당국이 학생이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휴대폰을 계속 사용하도록 허용한다면 특히 그렇다. 학생은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 중 상당 부분을 건강한 사회성 발달에 필요한 대면 상호 작용 대신에 소셜 미디어에서 최신 소식을 훑어보는 데 쓸 테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고립감이 더욱 심화될 것이다.’
사회적 박탈, 수면 박탈, 주의 분산, 중독. 이 4가지 기본적인 해악을 종합하면, 놀이 기반 아동기가 스마트폰 기반 아동기로 변하자마자 왜 그토록 갑자기 아이들의 정신 건강이 크게 나빠졌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게 반드시 아이들만의 문제일까요? 저는 어른들도 이 네 가지 해악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불안 세대>의 저자 조너선 하이트는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사주거나 사회적 관계 서비스 가입하는 연령을 14세나 16세로 정함으로써 스마트폰의 해악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자고 하는데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바로 어른들입니다.
책을 읽고 결심했어요. 사회적 박탈, 수면 박탈, 주의 분산, 중독. 네 가지 해악을 멀리하자고. 사람을 만날 때는 스마트폰은 잠시 멀리하고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쇼츠를 보는 습관은 불면증의 원인이 되므로 피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각종 앱들의 알람 설정을 끔으로써 집중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어요. 끝으로 스마트폰 사용이 혹 중독의 수준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하고 돌아보려고 합니다.
스마트폰이 해로우니 당장 없애버리자는 말은 아닙니다. 자동차 사고로 매년 수만 명이 목숨을 잃으니 자동차를 없애자고 말하지는 않잖아요. 다만 좀더 안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속도 제한을 만들고, 음주 단속을 하고, 특정 연령 이상이 되어야만 운전을 할 수 있게끔 법으로 강제하지요. 스마트폰도 그런 접근을 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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