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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친절한 죽음이란 무엇인가

by 김민식pd 2023. 7. 14.

1997년 보라매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증 환자를 부인의 요청으로 퇴원시켰다가 부인과 의료진이 살인치사와 살인방조죄로 형사 처벌받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병원마다 중증 환자의 퇴원을 억제하기 시작하면서 의료비 부담으로 자살하거나 가족이 환자의 연명 의료장치를 제거하는 사건이 빈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4명 중 3명이 병원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중증 환자 대부분이 죽음의 시간을 질질 끄는 연명의료의 지옥에 갇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재앙을 겪다가 생애 동안 쓰는 의료비의 대부분을 마지막 1~2년 동안 쏟아붓다가 사망하게 됩니다. 화려한 장례식장은 있어도 임종실은 없는 병원의 불친절한 죽음의 시스템을 다시 생각하게 해봐야 할 때입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사는 것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삶의 완성으로서의 좋은 죽음을 이야기하는 책을 소개합니다.

<나는 친절한 죽음을 원한다 : 삶의 완성으로서의 좋은 죽음을 말하는 죽음학 수업> (박중철 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2009년부터 호스피스 완화의료기관에서 말기 환자들의 마지막을 지켜온 박중철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병원에서 죽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장례식장에 가려면 사망진단서가 필요하고, 사망진단서에 기록되는 죽음의 종류는 병사·외인사·불상밖에 없습니다. 병원에서 죽음을 허락받으려면 병사가 돼야 하는데, 병원 입장에서 병은 치료해야 하는 것이기에 임종 전까지 환자들은 수많은 검사를 하게 됩니다. 죽음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니 자연사는 도태되고 없습니다.”

의학적으론 의식과 기력이 떨어져 음식을 섭취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지면 자연스럽게 죽음에 이릅니다. 이 과정에서 탈수가 발생하고 피가 산성화하면서 고통 대신 행복감을 느낍니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평화주의자 스콧 니어링이 존엄한 죽음을 위해 곡기를 끊은 대표적 사례지요. 저자는 “스스로 음식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물과 영양 공급을 하는 건 자연스럽게 평온해지는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현행법상 사전에 연명의료 중단 의사를 표시하더라도 물과 영양 공급은 중단할 수 없거든요.

요양원에서 6년간 촉탁의를 하던 시절, 의미 없는 의료행위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환자들을 돌보았답니다. 말기 치매환자, 파킨슨 환자 등, 억제대에 묶여 있는 환자에게 콧줄 넣고 인공 영양제를 강제로 투여합니다. 환자에게 고통을 주는데 생명을 지키는 거니까 윤리적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과연 정말 그것이 환자를 위한 길일까요?

병원에서 매일같이 환자들의 죽음을 겪고, 그 경험 속에서 저자가 깨우친 것은 인간에게 늙어감과 죽음은 필연이지만, 후회 없는 삶과 평온한 죽음은 선택이자 부단한 노력의 결과고요. 어느 정도의 행운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자는 의사로서의 성공보다 한 인간으로서 좋은 삶의 마무리를 궁극적인 인생의 목표로 삼게 되었다고요. 한국 사회에서는 마지막까지 후회와 고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우울하고 비참한 삶의 결말을 겪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랍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원 사망보다 더 나쁜 죽음은 없다. 잘 죽는다는 것은 집에서 죽는 것이다. 왜냐하면 병원은 주삿바늘이 쉴 새 없이 몸을 찌르고, 종일 시끄럽고, 밝은 불빛으로 잠들 수도 없고,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도 못한 채 낯선 사람들 속에서 외롭게 죽기 때문이다.”

‘좋은 죽음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죽는 것’이라는 말이 있어요. 미국인의 90%는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이루는 사람은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답니다. 미국에는 ‘죽음 산파death midwife’라는 직업이 있어요. 집에서 아이를 낳을 때 출산을 돕는 산파가 있듯이 가정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환자를 돕는 지역 사회의 호스피스 전문가를 ‘죽음 산파’라고 부릅니다. 

죽음 산파이자 좋은 죽음 운동가인 안젤라 메니토는 ‘좋은 죽음은 아쉬움 없이 살다가 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잘 죽는다는 것은 잘 사는 것의 결과물이며 죽음의 순간을 두려워하기보다 죽음이 가지고 있는 교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내면의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고요. 

우리나라는 보건의료 환경 분야의 수준은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평화로운 임종을 위한 임종의료 체계가 미흡하고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들의 수도 적으며, 그로 인해 많은 말기 환자들이 사망 직전까지 중환자실에서 연명의료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영국을 비롯한 상위 국가들은 많은 수의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이 지역마다 고루 분포해 있고, 비용도 국가에서 전액 부담하고 있어서 호스피스에 대한 말기 환자의 접근성이 매우 높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국은 말기 환자의 95%가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이용합니다. 미국은 43%, 대만은 30%가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한국의 경우 2017년 22%로 여전히 말기 암 환자 대다수가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제공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가 무의미할 때는 통증, 호흡 곤란 등 증상을 조절하고 인간적인 돌봄을 제공하여 존엄하게 임종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 죽음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고통스러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에 생애 말기에 대부분 의료기관에 입원하게 되는데요. 문제는 그러다 되레 연명의료의 고통에 빠지는 함정이 있어서 대안으로 연명의료 없이 고통 경감에 주력하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기관의 확대가 매우 중요합니다.

전 국민의 4명 중 3명이 병원에서 삶을 마감함에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것을 사명감이라 여기는 의사는 없습니다. 병원 안에는 끝까지 살리기 위한 중환자실은 있지만 가족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할 수 있는 임종실은 없습니다. 병원들이 앞다퉈 장례식장은 확장하면서 임종실 설치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습니다. 병원은 죽어가는 환자를 고객으로 맞으면서도 자신은 철저히 생존만을 위한 공간인 것처럼 위장하며 죽음을 불편한 불청객처럼 대하는 거죠.

이유는 단순합니다. 의사들은 죽어가는 환자 앞에서 마치 종교가 부정되는 것처럼 자신의 자부심인 기술주의 의학이 무력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죽음을 긍정하지도, 죽음에 대한 대화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지요. 죽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 기술주의 도그마가 지배하는 병원의 정체성에 위배되기 때문이지요. 임종실 대신 더 큰 비용이 들더라도 첨단 장비로 가득 찬 중환자실 병상 하나를 더 늘리는 게 도그마에 부합됩니다.

기술주의에 젖은 현대 의학의 모습을 보면 더 이상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마지막은 없는 것 같습니다. 현대인들 모두가 자신이 언젠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살아가는데 의사들이 죽음에 대해 친절할 리는 만무합니다. 병원과 의료인들의 변화를 요구하기 전에, 우리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생존 경쟁에 몰두하느라 꽁꽁 감춰왔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삶의 공간에 드러내는 노력이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UN이 발표하는 국가별 행복지수를 보면, 한국은 주로 중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성적은 안타깝게도 2016년부터 50위권을 기록하다가 2020년에는 61위까지 하락했습니다. 한국인의 연간 근로시간은 OECD 회원국 중 멕시코 다음으로 길고, 고령화 속도는 압도적 1위이고, 노인 빈곤율도 가장 높습니다. 충격적인 사실은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정신적인 행복지수 역시 매우 낮다는 것이지요. 유럽연합과 OECD 회원국 38개국을 비교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신체적 건강은 13위, 학업 및 사회적 능력은 11위로 상위권이지만, 정신적인 안정과 행복감에 대한 지표에서는 38개국 중 34위를 기록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청장년기에서 노년기로 진행할수록 자살 생각이 증가하는데요. 노화로 신체적 기능이 감소하고 사회적 관계도 위축되며 퇴직 후 경제 능력의 저하 등 전반적인 삶의 여건이 부정적으로 변화되기 때문이라고요. 우리는 어려서는 학업과 성공에 대한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노출되고, 성인이 되어서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에 내몰리고, 이후 노화에 따른 육체적 질병으로 삶의 의지가 위축되고, 은퇴 후 경제적 빈곤까지 겹치면서 결국은 자살로 내몰리게 되는 겁니다.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에게 조금 더 친절한 삶이라 생각합니다. 치열하게 살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죽음과 싸우는 게 과연 좋은 삶일까요? 우리 모두 맞이할 죽음의 모습에 대해,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인가, 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많이 힘들었습니다. 불편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 꼭 한번은 고민해봤으면 하는 문제입니다. 친절한 삶, 친절한 죽음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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