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6일, 뉴욕 여행기 2일차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브루클린 다리로 향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뉴욕 걷기 여행의 명소 중 하나입니다.
전세계에서 여행 온 사람들이 찾는 곳.
영화에서 본 그 다리를 직접 걸어서 건넌다는 데 의미가 있지요.
이제 다시 타임즈스퀘어로 갑니다.
야, 저 친구, 이 추운 1월에도 저러고 다니네요. 타임즈스퀘어의 명물, 빤쓰 차림의 카우보이. 예전에도 본 적이 있는데, 한겨울에도 건재한 모습을 보니 반갑습니다. 근력 운동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아, 저 분, 운동 엄청 많이 하시는구나. 저런 몸이 절대 쉽게 만들어지지 않더군요.
뉴욕에 온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뮤지컬<해밀턴>입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의 독립 전쟁의 영웅이자 초대 재무장관입니다. 워싱턴 대통령이 첫 임기 중에 중요한 일은 모두 이 젊은 재무장관에게 맡겼습니다. 연방주의자 해밀턴은 신생국인 미국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농업, 공업, 상업이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하며,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를 위해 그는 연방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미국의 독립 초기에도 농업이 발달한 남부와 공업이 발달한 북부 사이에 의견 대립이 많았습니다. 그는 북부 뉴욕 출신인데요. 남부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수도 이전까지 제안합니다. 독립전쟁까지만 해도 뉴욕이 미국의 중심이었는데요. 새로 생긴 연방 정부의 수도를 남부에 가까운 워싱턴으로 하겠다고 한 거죠. 허울뿐인 수도는 남부에 넘겨주고 정책의 실리는 챙길 줄 아는 사람. 비록 수도는 워싱턴이지만, 실질적인 미국의 중심은 여전히 뉴욕입니다.
이구한 선생님이 쓰신 <이야기 미국사>에 나오는 글.
'워싱턴 대통령의 측근에 있던 해밀턴과 제퍼슨 사이에서는 몇 가지 재미있는 점들이 발견된다.
두 사람은 출신 성분은 물론 인간에 대한 정의부터가 서로 상반되었다. 해밀턴은 ‘인간은 커다란 짐승이다.’라고 정의한 반면 제퍼슨은 ‘생각하는 육체’라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해밀턴은 강력한 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고, 제퍼슨은 본래 선한 인간을 사회가 타락시킨다고 생각하여 정부는 될 수 있는 한 무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격이 완고하고 열성적이었던 해밀턴은 무질서를 미워한 반면 대범하고 친절을 미덕으로 삼던 제퍼슨은 인간 생활의 조그만 난동 정도는 자연의 비바람처럼 여기는 타입이었다. 그러나 해밀턴은 낭만주의자였고, 자신을 이상주의자로 생각했던 제퍼슨은 현실주의자였다. 그 점은 해밀턴은 은행가의 지지를 얻으려고 애썼고, 제퍼슨은 농민의 지지를 원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세상에 은행가보다 농민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은 극명한 현실이었다. 한마디로 해밀턴은 이론가였고 제퍼슨은 정치가였다.
동 시대에 심히 상반되는 이 두 사람의 틀 안에서 심한 불편을 느끼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초기의 헌법이 상당한 융통성과 탄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저는 이게 워싱턴 대통령의 탁월한 용병술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상반되는 의견을 가진 보좌관들을 곁에 두고 다양한 의견을 청취한 거지요. 동일한 직업적 배경이나, 계급적, 사상적 구성을 가진 내각을 꾸리면 자칫 편협한 리더가 되기 십상입니다. 해밀턴은 쉽게 말하자면, 이성계의 오른팔 정도전 같아요. 미국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세웁니다.
후손들이 다 인정해주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 해밀턴. 대통령 출신이 아님에도 미국 달러에 얼굴을 올립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시골에서 천애고아로 자랐어요.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잘 써서 동네 사람들이 명석함을 알아보고 십시일반 돈을 모아 유학을 보내줍니다. 공부 끝에 그는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이 되어야한다고 믿게 되고요. 독립운동의 투사가 됩니다. 워싱턴을 도와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요. 정치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데요. 충분히 워싱턴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인생이 꼬이고요. 결국에는 절친한 친구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습니다. 영국과의 전쟁에서 같이 싸운 전우인데, 독립 이후 권력 다툼으로 친구가 원수로 변하거든요. 워낙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기에 뮤지컬의 주인공이 될만한 인물입니다.
디즈니 플러스에 올라온 <해밀턴> 공연 영상을 보고 반했어요. 음악과 안무와 스토리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작품. 무엇보다 뮤지컬의 노래를 랩처럼 소화한다는 게 너무 신선했어요. '아, 이 작품으로 브로드웨이가 또 한 차례 진화하는구나.' 싶었어요. 가사가 잘 들리지 않아 미리 유튜브로 여러차례 들어보고 공연을 보러 갔어요.
2018년 영국 런던에 갔을 때나 2015년 뉴욕에 갔을 때, 가장 핫한 뮤지컬이 <해밀턴>이었는데요, 너무 인기가 많아 할인 티켓이 없어 포기하고 그냥 <레미제라블>이나 <맘마미아>를 봤어요. 공연한 지 오래된 작품들은 할인 티켓이 있거든요. 이번에는 기필코 해밀턴을 봐야지! 했는데...
온라인 예매로 알아보니, 제일 싼 티켓이 평일 저녁 162불. 20만원! 주말 로얄석은 심지어 500불입니다. 아, 너무 비싸네요. 포기할까? 하다 혹시나싶어 극장에 직접 찾아갔어요. 싼 표가 있냐고 물어보니 그날 저녁 공연 중 Partial View라고 무대의 일부가 안 보이는 자리 티켓이 99달러. 얼른 샀습니다.
그날 저녁, 극장 안을 꽉 채운 인파들. 역시 핫한 뮤지컬이네요.
발코니석에서 봅니다.
은퇴자의 정신승리. '나는 99불을 쓴 게 아니라, 63불을 아꼈으니 돈을 번 것이다!'
뉴욕에서 일주일간 여행하며 단 한번도 택시나 우버를 타지 않았어요. 배낭을 메고 걷거나 전철을 탈 때마다 돈을 버는 기분입니다. 호텔비는 아깝지않아요. 노숙을 할 수는 없으니까. 아낄 수 있는 경비는 최대한 아낍니다. 거기에 지속가능한 세계일주가 있다고 생각해요.
참고로 2023년 1월 뉴욕 브로드웨이 티켓 가격 입니다.
라이온킹 162불
알라딘 120불
팬텀 310불
시카고 69불
옛날보다 더 비쌉니다. 물가가 오른 탓고 있고요. 코로나 이후 보복소비 탓일 수도 있어요.
뮤지컬 티켓을 산 후, 뉴욕 공공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가다보니 저 멀리 조명 크레인이 보이네요. 어라? 영화를 찍고 있나? 호기심에 찾아갑니다.
주인공의 뒷 모습...
누구지? 궁금한 마음에 감독 모니터석 뒤로 갑니다. 아니, 저 분은!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캐리 브래드쇼 아닌가?
머리속에서 이름이 맴돌아, 옆에 있는 분에게 여쭤봤어요.
"누구지요?"
"사라 제시카 파커요."
아, 맞다! 시트콤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를 연기한 사라 제시카 파커!
<섹스 앤 더 시티>의 새로운 시즌을 녹화하는 중이었어요.
뉴욕 공공도서관 뒷편, 브라이언트 파크 일각에서 촬영하는 중. 뉴욕 공공도서관은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 브래드쇼가 사랑한 공간이거든요.
이 기가 막힌 우연이라니! 제가요, 95년도에 통역대학원 다닐 때, 회화 청취 공부하느라 미국 시트콤을 즐겨봤고요. 그러다 시트콤 폐인이 되어, '이 재미난 시트콤, 내가 직접 만들어보자.'라는 생각에 96년도에 MBC 입사했어요. 시트콤 연출할 때, 1998년에 만들어진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며, 영상문법을 공부했거든요.
그런데, 나이 쉰 다섯에 은퇴 후 떠난 뉴욕 여행에서 캐리 브래드쇼를 만나다니! 마치 나의 20대가 50대의 나를 만나러 와준 것 같은 기분. 정말 뿌듯합니다.
이제 발길을 뉴욕공공도서관으로 돌려요. 이 웅장한 건물은 철골 구조물이 아니라 대리석 구조물입니다. 시멘트와 콘크리트로 만든 게 아니라 거대한 돌을 깎아만든 석공들의 작품이라는 거죠. 유럽에는 왕궁과 성당이 있다면, 뉴욕에는 공공도서관이 있습니다. '보라, 우리에게도 이런 건축물이 있다!'라고 외치는 듯.
축구장 크기를 자랑하는 로즈 열람실. 중간에 기둥이 없어요. 양옆의 벽으로 이 넓은 공간을 지탱합니다. 1911년 당시 이 정도의 건축 기술은 쉽지 않았지요. 유럽의 왕궁이나 교회당이 왕족과 사제들을 위한 공간이라면, 공공도서관은 모두를 위한 장소입니다. 미국의 자부심이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는 만인을 위해 봉사하는 공간을 만든다. 귀족이나 왕족이 아니라도 누구나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100년 전, 그 정신이 미국을 위대하게 만든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읽으면 큰 돈을 버는 방법을 배운다는 이도 있는데요. 그 점 또한 인정합니다. 제가 도서관에서 배운 건요. 조금 달라요. 돈 한 푼 쓰지 않고도 책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겁니다. 돈을 벌고 못 벌고는 운의 결과입니다. 돈을 쓰지 않고 즐길 수 있는가, 아닌가, 그건 노력의 결과고요.
'뉴욕 공립 도서관 New York Public Library
1895년 카레르 & 헤이스팅스 사에 의해 건설되어 1911년 오픈한 미국 최대 도서관 중 하나로 1901년 앤드루 카네기가 거금을 기부하면서 완공을 서두를 수있었다. 도서관 입구의 두 마리 사자상이 유명한데, 인내와 용기를 뜻한다. 내부는 아름답고 고풍스러우며 특히 3층의 공개 도서실에는 고전 책들이 가득 하고, 천장을 메운 벽화와 샹들리에 또한 멋스럽다. 5,000만 권 이상의 다양한 책과 희귀본을 소장하고 있으며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구텐베르크 성경 원본까지 소지하고 있다. 무료 가이드 투어를 통해 도서관의 역사를 더욱 상세히 알 수 있다. 영화 <섹스 앤 더 시티>에서 주인공 캐리가 결혼식을 하려던 장소로 나오기도 했다.'
<뉴욕 셀프트래블 : 2019-2020 최신판 | 조은정>
앤드류 카네기는 가난한 이민자의 아들이었어요. 어려서 그는 면화 공장에서 주급 1달러 25센트를 받고 실패 감는 일을 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돕느라 학교를 다닐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었는데요. 마을의 은퇴한 노인이 소장하고 있던 400여 권의 책을 모아, 일하는 소년들을 위해 도서관을 열고 토요일마다 책을 빌려 주는 일을 합니다. 한 사람의 기부로 만들어진 시골의 작은 도서관은 책을 살 돈도, 읽을 시간도 없었던 어린 카네기에게 독학의 기회를 제공했고요. 훗날 카네기의 성공에 발판이 되었지요. 사업가로서 성공한 카네기는 어린 시절 자신이 누린 행운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공공 도서관 건설에 막대한 후원금을 냅니다.
도서관 설립 기념비에는 이렇게 적혀있답니다.
“지식과 상상력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받은 근로 소년 앤드류 카네기가 감사의 기억으로 이 기념비를 세운다.”
요즘 매일 블로그 글을 올리느라 많이 바쁩니다. 장시간 고개 숙이고 허리를 굽혀 키보드를 두들기니 또 어깨와 허리 통증이 도지고 있어요. 그럼에도 열심히 여행기를 쓰고 있어요. 저 역시 어린 시절, 도서관에서 많은 걸 받은 사람입니다. 내가 받은 걸 갚는 방법은, 책 읽는 즐거움, 영어 공부하는 보람, 여행 다니며 얻은 깨달음을 여러분과 나누는 길이라 생각하니까요.
삶은, 하루하루가 다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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