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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냉소하지 맙시다

by 김민식pd 2023. 2. 24.

좋은 삶의 정의란 무엇일까요? 어려서 좋은 삶은, 좋은 부모 만나 좋은 환경에서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자식을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부모도 선택할 수 없지요. 어려서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다고 나쁜 삶일까요? 스무 살 이전의 삶은 타고난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어려서는 불행했어도 스무 살 이후 어른이 되어 어떻게 사느냐로 좋은 삶을 꾸려갈 수 있어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청년이 힘든 세상에서 희망을 어떻게 찾는가, 오늘은 책을 통해 배워볼까 합니다. 

<쇳밥일지> (천현우 지음 / 문학동네)

저자인 천현우 작가의 삶은 참 파란만장합니다. 아버지는 바람을 피우다 집 한 채를 통째로 날립니다. 젖먹이 아기인 저자를 기른 건 생모가 아니라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 심여사인데요. 그분도 아버지와 이혼을 해요. 심여사는 여덟 살 난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와 여관살이를 합니다. 전세 살 보증금조차 없어 여관에 월세 내고 살았던 거죠. 자신의 소생이 아닌 아이를 돌보랴, 일하며 생계를 꾸리랴, 고생하던 심여사는 병이 납니다. 저자는 아버지랑 단둘이 살게 되는데요. 아버지는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해 이리저리 쏘다니느라 열 살 난 아들을 방치합니다. 


매일 혼자 잠들던 아이는 결국 영양실조로 쓰러지고요. 병원에서 눈을 떠보니,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엄마라며 나타납니다. 나이 열 살에 생모의 얼굴을 처음 봤다고요. 이제 아버지 곁을 떠나 생모랑 사는데요. 생모에게서 다양한 방식의 폭력을 경험합니다. 하도 맞아서 멍이 심하게 든 날엔 학교도 못 가요. 이렇게 살다 죽을 것 같아 다시 심여사를 찾아갑니다. 비록 자신을 낳아준 엄마는 아니지만 심여사가 어머니라 생각하고 살아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등록금이 싼 기능대를 갑니다. 현장실습을 위해 공장에 나가는데요. 뜨거운 에폭시 수지를 옮기는 일을 하다 발에 쏟아 중화상을 입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학생이라고 공장에서는 산재 처리도 안 해줍니다.

공장 다니며 고생하는 아들을 보던 심여사는 아들을 번듯한 대학을 보내려면 등록금이라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시장에서 만난 사람이 좋은 투자처가 있다는 얘기에 돈을 끌어 빌려줬다가 사기를 당합니다. 그동안 모은 돈만 날린 게 아니라 자신을 믿고 돈을 빌려준 지인들 돈까지 떼입니다. 시장 사람들이 집으로 몰려와 돈을 갚으라고 난리를 칩니다. 아들이 나서요. 제가 평생 일을 해서 어떻게든 갚겠으니 일단 조금만 기다려달라고요. 엄마 대신 빚을 갚겠다고 서약서를 씁니다. 그걸 보고 엄마가 아들에게 그럽니다. 미안하다고, 이걸 다 어떻게 갚냐고, 왜 계약서를 써줬냐고. 아들이 엄마한테 그럽니다.

“일 년도 안 사귄 사람한테 1억도 맡깄으면서, 아들은 몬 믿어예? 아들 믿으이소. 어떻게든 해볼테니까.”

큰소리를 쳤지만,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받는 한 달 월급이 120만원인데, 갚아야 할 돈은 8000만원이에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용접 기술을 배우고요. 꼬박꼬박 돈을 벌어 빚을 갚아갑니다. 우울하기만 하던 저자의 인생은 한 사람을 만나 전환점을 맞습니다. 그가 쓴 글을 눈여겨보던 공장 사무실 직원이 말을 걸어옵니다. 두 청춘 남녀가 같이 도서관도 다니고 책도 읽고 감상평도 나누는 독서 모임을 해요. 그렇게 만남을 이어가다 여자가 먼저 정식으로 사귀자고 고백을 합니다. 저자는 솔직하게 자신의 상황을 들려줍니다.

“저예. 빚쟁이에 그지새끼라예. 게임 폐인이라 밖에도 잘 안 나갑니더. 공부 싫어해서 공장 일 아이면 몬하고, 책도 별로 안 좋아합니더. 죽어라 일해봐야 월 200도 못 벌고예. 그쪽 생각맨치로 멋진 사람이 아이라예. 그이까는, 얼른 가이소. 더 어울리는 사람 찾으이소.”

고백을 했다가 거절의 말을 들은 상대방의 눈시울이 빨개집니다.

“그럼 진짜 멋져지세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잇습니다. “운동 열심히 하시구요. 책 더 읽고, 글도 다시 쓰세요. 저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세요.”



용접공으로 일하던 저자가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있어요. 어느 날 현장에서 사고가 납니다. 원룸 너비 만한 거대한 철판이 사람을 덮쳐요. 용케 피하긴 했지만 10톤짜리 중량이 작업자의 뒷다리를 칩니다. 사람이 죽을뻔한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그제야 깨달아요. 나도 저렇게 사고를 당할 수 있겠구나. 내가 누린 일상이란 그저 불행이 닥치지 않았기에 유지됐을 뿐. 나 또한 언제든 다칠 수 있으며, 사고로 인해 삶이 끝날 수 있어요. 중소기업 공사현장의 이런 현실을 누가 알아줄까요? 기자? 정치가? 금속노조? 진보 지식인? 아니에요. 당사자의 목소리가 없는 공론은 허상일 뿐이지요. 저자는 그날부터 용접공으로 일하며 보고 들은 바를 촘촘하게 기록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일기장을 샀다. 맨 앞장에 허세 잔뜩 들어간 문구도 썼다. “일기란 개인의 역사다!” 막상 느낌표를 쓰고 나니 자학처럼 느껴졌다. 저 글귀대로라면 그간 내 역사는 숱한 외세의 침략을 받은 셈 아닌가. 그날부터 점심밥을 후루룩 휘몰아 먹고 공장 앞 야외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차피 낮잠 잘 공간도 없는 회사, 하루하루 일기 쓰는 습관들이기에 아주 적합했다. 주차장 외곽엔 공원처럼 벤치와 평상이 놓여 있었다. 주로 함바에서 나온 기사님들이 마주 앉아 커피와 담배를 즐기는 곳이었다. 그곳에 앉아 전날 밤부터 그날 낮까지 있었던 일을 기록했다.’

일기처럼 쓰던 글이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고, 그는 어느덧 20대 지역 청년 노동자의 삶을 대변하는 사람이 됩니다. 책을 내고 저자가 되고 이제는 대학 졸업식에 가서 축사도 합니다. 자신의 또래들 앞에 서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세대는 아주 심각해진 불평등을, 아주 쉽게 체험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대기업과 공무원의 성벽은 너무나 높고 두터운데, 입성하지 못한 대다수가 쥐꼬리만한 월급과 하루살이 같은 고용에 떨어야 해요. 지방엔 일자리가 없고 직장 찾아 서울 오면 월세는 내 월급의 절반 가까이 되죠. 갚지 못한 대학 등록금은 두고두고 우릴 괴롭힐 테고요. 정말이지 우리는 이렇게나 힘든데, 정작 SNS 보면 대다수가 행복하고 자기 삶을 멀쩡하게 잘 살아내는 것처럼 보여요. 현실에 거의 없는 예쁘장한 남녀들끼리 맨날 맛있는 음식과 멋들어진 여행지 사진을 올려요. 대학 서열을 매기고 연봉을 자랑하며 외제 차 키와 통장 잔액을 인증하지요. 이렇듯 행복은 평범한 사람들이 갇힌 울타리 바깥에 전시되어 있어요.

그럼 우린 어떻게 행복을 찾아야 할까요?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노력해서 성공하면 될까요? 아니면 평생 금수저들 욕하면서 정신 승리를 하면 될까요? 제가 보기엔 둘 다 비효율적인 방법 같아요. 둘 다 결국 타인과 비교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질 못하잖아요. 비교는 위안거리까진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행복까지 닿을 순 없어요. 행복은 우선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싹이 트지 않거든요. 그럼 어떻게 해야 자신을 사랑하게 될까요? 사람마다 각자의 행복 기준이 달라 참고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사랑하면서부터 행복에 가까워졌습니다.‘

저자가 용접을 시작한 건 2014년. 집에 빚이 너무 많아서 주야 교대로 자동차 공장 다니면서 주말엔 막노동을 했습니다. 그때 용접을 참 잘하는 어떤 아저씨를 만나는데요. 어린 저자에게 기술을 배우라고 권합니다. 용접은 배우면 어디든 도움이 된다고요. 그분의 말씀.

  “야, 현우야. 우리 없으면 누가 다리 만들어주냐? 우리뿐만 아냐. 청소부, 간호사, 택배, 배달, 노가다, 이런 사람들 하루라도 일 안 하면 난리 나. 우린 다 대단한 사람들이야. 기죽지 마.”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선 무엇보다 냉소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냉소는 인간의 가장 나쁜 감정입니다. 분노나 증오마저 마음먹기 따라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냉소는 그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 뿐이에요. 대상을 이해할 생각도 없고 공감하지도 못하니 무슨 발전이 가능하겠습니까.

여러분, 냉소하지 맙시다. 자신과 일상, 동료들과 일, 오늘과 내일을 진심으로 사랑합시다. 내 주변의 내가 의식한 모든 것들이 우연이고 행운이며 이를 소중하다고 여길 때, 비로소 내 삶의 주체가 오롯하게 나가 되고, 그때가 되면 반드시 행복은 따라옵니다.’

어려서 불행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태어난 환경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어른이 되어 태어난 환경 탓만 하고 사는 건 내가 불행을 선택하고 계속 살아가는 겁니다. 나이 스물에, 서른에, 마흔에 내 인생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그걸 찾아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한다면 언젠가 내 삶은 더 좋아질 수 있어요. 2014년 어머니가 진 빚 8천만원을 갚기 위해 용접 기술을 배운 청년이 2022년 책을 쓴 저자가 되었어요. 


책을 보며 인생을 사는 자세에 대해, 좋은 삶의 조건에 대해 다시 공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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