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텃밭을 갈아엎고 배운 점

by 김민식pd 2023. 1. 13.

나이 들어 뼈저리게 외로움을 느껴본 건 2013년이었습니다. MBC 노조 부위원장으로 2012년 170일 파업에 앞장선 후 정직 6개월, 대기발령, 교육발령 등 징계 3종 세트를 받고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지요. 경영진에 미운털이 박혀 피디로서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 앞에서는 최대한 당당해 보이려고 노력했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지요. 그때 읽은 책이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최재천, 삼성경제연구소)입니다. 2005년에 나온 이 책의 부제는 ‘생물학자가 진단하는 2020년 초고령 사회’였어요.

최재천 교수님은 이 책에서 ‘고령화 사회란 모두가 외로워지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직장을 나온 은퇴자들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부부가 같이 해로하면 좋겠지만 초고령 시대에 둘 중 하나는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하죠. 긴 노후를 혼자 어떻게 보낼 것인가? 최 교수님은 삶을 이모작한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직업을 찾아가야 한다고 말해요. 

이모작이란 같은 땅에 다른 품종의 농작물을 두 번 심어 거둔다는 뜻이에요. 오십 이후의 삶을 농작물을 거둔 땅에 두 번째 품종을 심는 거라 여겨야 한다는 거죠. 2020년 초고령 사회가 오기 전에 매일 글쓰기를 훈련해 작가로서 인생을 이모작을 해보려고 마음먹었어요. 10년 동안 매일 아침 블로그에 글을 올렸어요. 수확은 5년 후부터 시작되더군요. 2017년에 낸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위즈덤하우스)가 운 좋게 베스트셀러가 되고, 2018년에는 드라마 피디로 복귀했습니다. 피디로서 연출을 재개하고 저자 강연도 하고 유튜브도 했어요. 인생 이모작을 하려다 삼모작, 사모작까지 하게 된 거죠.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제 병충해로 벼가 시들어도(드라마 연출로 망해도) 밥 굶을 걱정은 없다. 감자(칼럼 기고)도 있고 고구마(출판)도 있고 약재 식물(유튜브)까지 키웠으니까.’

노후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쓰나미를 동반한 태풍이 몰아닥쳤습니다. 

2020년 11월에 신문에 낸 글이 평지풍파를 일으키며 거센 역풍이 되어 휘몰아쳤습니다. 예전에 노조 집행부로 일하며 싸울 때 온라인상에서 욕을 좀 먹어봤어요. 종북좌파 빨갱이라는 소리도 듣고 ‘저놈의 목을 치라!’는 험한 소리도 들었지요. 그래도 힘들지 않았어요. ‘나쁜 놈들이 하는 말은 내게 상처가 되지 않는다. 저들이 소리 높여 나를 욕하는 건 내가 잘 살고 있다는 뜻이니까.’라고 마음을 추스르며 계속 싸움을 이어갔죠. 

하지만 2020년에는 달랐어요. 좋은 사람들이 선한 의도로 나를 비난하는 글은 상처가 되더군요. 블로그에서도 저에 대한 원성과 비난이 이어졌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위로의 댓글을 남긴 분들도 있었습니다. ‘피디님,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죠.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런 글이 다시 분노를 불러왔어요. ‘이 사람이 얼마나 나쁜 짓을 했는지 몰라? 어떻게 이런 사람을 편들 수 있는 거지?’ 나를 응원해 준 사람까지 욕을 먹는 상황이었어요. 좋은 의도를 가진 이들이 서로를 비난하며 싸우는 형국으로 치달았어요. 저의 잘못으로 인해. 그때 결심했습니다. 철저히 외로워지기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설프게 내 편을 모아 상황을 모면하려다 오히려 더 큰 위기를 부를 수도 있어요. 섣불리 뭔가를 지키려다 더 소중한 것까지 잃을 수 있기에 미련 없이 내려놓았습니다. 

인생 이모작을 위해 오랜 시간 가꿔온 터전을 내 손으로 갈아엎었습니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블로그를 중단하고 강연 활동도 접었습니다. 조용히 물러나서 혼자 견뎌보자고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뉘우치며 사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책 속에서 답을 구하고 글쓰기로 고민을 이어가는 것뿐입니다.


2년 동안 공부한 내용을 책으로 묶어냈습니다. 새 책 <외로움 수업>이 나왔다는 소식에 댓글을 달고 응원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고독과 시련을 견딘 후, 사람들 곁으로 돌아와 다시 함께 온기를 나눌 수 있어 다행입니다. ‘외로움 수업’의 끝에서 제가 깨달은 건, 그래도 역시 희망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저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반응형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모두 강사가 됩시다.  (10) 2023.01.18
내가 MBC를 떠난 이유  (11) 2023.01.16
<외로움 수업>이 나왔습니다  (38) 2023.01.11
최악의 상사 구분법  (13) 2023.01.06
행복은 덧셈일까, 뺄셈일까  (10) 2022.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