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북스에 기고한 서평입니다.)
PD로서 내가 들은 가장 신랄한 혹평은 예전에 청춘 시트콤 <뉴 논스톱>을 연출할 때, 누군가 시청자 게시판에 올린 글이다.
"김민식 PD는 자칭 시트콤 마니아며, 미국 시트콤 <프렌즈>의 열렬한 팬이라고 하면서 왜 정작 자신이 만드는 시트콤은 <프렌즈>보다 훨씬 떨어지는 저질 시트콤인거죠?"
'시청자와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친절한 연출'이라고 자부하는 나는 바로 댓글을 달았다.
"미국의 <프렌즈>는 1년에 24편 만듭니다. <논스톱>은 일일 시트콤이라 1년에 200편 넘게 만들고요. <프렌즈> 편당 제작비는 수십억이고요, 저희는 편당 1500만 원입니다. <프렌즈> PD보고 이 돈 갖고 1년에 200개 만들어보라고 하세요. 쉽지 않을 걸요?"
이런 후안무치한 소리를 변명이라고 했다니, 이제와 생각해보면 정말 부끄럽다. 하지만 그 시절엔 그게 나의 생각이었다. 당시에 BBC에서 온 프로듀서랑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다.
"너는 무슨 일을 하니?" "I am a daily sitcom director." "일일 시트콤이라고? 그런 포맷도 가능해?" (외국의 시트콤은 다 주1회 방송한다.) "응, 한국에서는 가능해." "넌 정말 빨리 찍는가 보구나. 비결이 뭐니?" "난 포기가 빨라."
가슴 아픈 얘기지만 일일 시트콤을 연출하려면 포기가 빨라야 한다. 장소가 마음에 안 들어서, 대본이 마음에 안 들어서, 연기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날씨가 마음에 안 들어서… 촬영을 접어야 하는 이유는 수만 가지지만, 그래도 오늘 중으로 촬영을 끝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다. 안 그러면 내일 방송 펑크다.
쪽 대본, 초치기, 불륜, 막장… 연출도 이런 수식어가 드라마 앞에 붙는 게 싫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면 어쩔 수 없다. 일주일에 5개를 만들어야 그만큼 광고 시간이 확보가 되고, 광고를 팔아야 제작비가 나올 것 아닌가. 내가 진정한 예술가라면 타협하지 않고, 완벽한 작품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지만, 매일 방송 시간이라는 마감은 어김없이 닥쳐온다. 대본 아이디어가 안 나온다고, 촬영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어느 순간 절필 선언을 하고 산으로 도망갈 수도 없지 않은가? 드라마 연출, 생각하면 참 뻔뻔하지 않고는 버티기 힘든 직업이다.
비슷한 이유로, 이번에 나온 책, 김환표의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인물과사상사 펴냄)를 읽는 것이 처음에는 망설여졌다. 신문 한 구석의 TV 비평으로 읽기도 불편한 한국 드라마에 대한 질타를 두꺼운 한 권의 책으로 읽어내는 것, 이거 드라마 PD의 자학 아닌가? 나는 뒤가 많이 구린 용의자의 심정으로 책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정말 방대한 증언과 자료를 내 코앞에
들이댄다. 이름난 선배의 숨겨진 일화를 만나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때로는 부역의 증거 같아 가슴 아프기도 하고, 막장 연속극을 향한 비난을 열거할 때는 피해 진술서를 읽는 듯이 쿡 쿡 찔렸다. 책을 읽으며 나는 저자의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다. 한국 드라마, 이렇게 용의주도하고 집요한 검사를 만났으니, 잘못 걸렸구나!
사실 드라마를 비평하기란 쉽다. 기본적으로 한국 국민은 '투잡'을 뛴다. 하나는 본인 직업, 하나는 드라마 비평가. 술자리에서 가장 씹기 좋고 안전한 안주가 드라마다. 정치나 종교 문제를 토론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 좌중에 연기력이 부족한 미남 배우의 열혈 팬만 없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전문가의 역할은 더 빛이 나는 법이다. 지은이 김환표는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자신만의 논리를 전개한다. 역시 전문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이 한국 드라마의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쪽 대본, 초치기, 막장, 불륜, 열악한 제작 환경 등 다양할 것이다. 용의자의 입장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변명은 하나다. 다 한국 방송 시장이 작은 탓이다. 우리도 미드(미국 드라마)나 일드(일본 드라마)처럼 일주일에 방송 한 편 만들면, 명품 만들 수 있다. 영어권 드라마처럼 해외 판권 시장만 크다면 다양한 소재에 도전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어 시장은 1억 명도 안 되는데 그나마 반으로 쪼개져있어 북한에는 판매도 안 된다. 결국 한정된 제작비로 광고 판매를 극대화하자니, 1주일에 두 편 아니면 다섯 편씩 만들어내야 한다. 빨리 찍자니, 통제와 카메라 세 대 동시 촬영이 가능한 스튜디오에서 녹화할 수밖에 없다. 세트에서는 그림에 힘을 줄 수 없으니, 독한 대사와 설정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에는 유독 일일 연속극이 많고 연속극은 막장으로 가기 쉽다.
재주 많은 드라마 작가는 누구나 처음에는 주인공에게 시련을 안겨주고 나중에는 주인공이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도록 이야기를 전개한다. 김환표가 그리는 한국 드라마가 걸어온 길도 비슷하다. '저속 퇴폐' '충성 경쟁' '자기 검열'라는 역경을 딛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국민의 사랑을 바탕으로 조금씩 성장해 간 결과, 한국 드라마는 '한류 열풍'이라는 세계적 성공 스토리를 일구어낸다. 한국 드라마가 걸어온 길은 어찌 보면 시청자가 그토록 드라마에서 원하는 신데렐라 성공 스토리다.
책을 읽으며 나는 작가의 시선에서 한국 드라마를 사랑하는 따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냉혹한 검사인 줄 알았더니, 누구보다 나의 입장을 잘 알고 대변해주는 친절한 변호사였구나! 즐거운 독서를 마치면서 허락된다면 피의자 최후 진술을 하고 싶다.
"한국 드라마, 이제까지 잘못한 점도 많지만, 애정을 가지고 지켜봐주시면 앞으로 더욱 잘 하겠습니다."
멘트는 식상하지만, 진심이다. 이렇게 열심히 드라마 문화사를 기록하는 학자가 있으니, 연출들도 앞으로 더욱 긴장해서 열심히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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