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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

후배에게 배운 한 가지

by 김민식pd 2012. 1. 15.
MBC를 다니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내가 얼마나 창의적인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가를 깨닫는 순간이다. 15년 전 입사 전형을 위해 1박 2일 동안 합숙 평가를 받을 때의 전율은 잊은 적이 없다. 필기와 면접을 거쳐 실무 평가까지 남은 사람들은 정말 하나같이 쟁쟁한 실력자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토론하고, 아이디어를 겨루고, 입담을 다투었다. 나는 언론사 입시 준비를 한 적이 없어서, 기획안 작성이나 모니터링 토론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같은 조원들의 발표가 신기하기만 했다. '우와! 다들 진짜 잘한다.' 입사하고 나서 합격자의 면면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그 사람이 떨어졌을까 싶은 사람은 있어도, 어떻게 저 사람이 들어왔을까 싶은 사람은 없다.'

MBC 드라마국 후배 중에 임찬이라는 친구가 있다. 드라마 '내조의 여왕'을 공동 연출할 때, 막내 조연출을 한 후배인데, 그는 입사 후 첫 작품으로 '내조의 여왕'에서 일하고 있었다. 처음 드라마 일을 하는데도 무척 빠릿빠릿하고 스마트했다. 입사 경쟁률이 높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의 즐거움이다. 정말 괜찮은 후배들이 들어온다.

임찬 피디를 내가 특히 아끼는 이유? 그는 조연출로서 일하는 게 아니라 연출을 준비하는 자로서 일한다. 선배 연출이 시킨 일을 수동적으로 하기보다 능동적으로, 창의적으로 고민하면서 나름의 플러스 알파를 만들려고 한다. MBC가 신입 피디를 뽑을 때, 조연출로 평생 부리려고 뽑는 게 아니다. 언젠가 연출로 작품을 맡기려고 뽑는거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조연출 생활을 하면서, 스탭에게 치이고, 배우에게 치이고, 매니저에게 치이고, 심지어 연출에게 치이면서 점점 의욕을 잃어간다. 제작 현장에서 사실 가장 만만한게 조연출이니까, 여기저기 채이다보면 능동적이기 보다 수동적이고, 창의적이기 보다 방어적이 된다. 그러나 임찬은 아무리 현장이 힘들어도, 자신의 목적을 잊지 않는다. 그는 현장의 막내 심부름꾼이 아니라 연출을 준비하는 사람이니까.

그의 진면목을 재차 확인하게 된 것은 그가 이번에 번역해 낸 책을 보고서 였다. 깜짝 놀랐다. 드라마 조연출의 삶은 정말 척박하다. 최근에도 어떤 후배가 일하다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을 정도로 노동 강도가 세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 와중에 책까지 번역하다니? 드라마를 하는 동안은 몇 달 동안 주말도 없고 퇴근도 없이 일한다. 그래서 2주 정도 휴가를 주면 다들 시체처럼 집에서 쓰러져 자다가 나온다. 그런데, 임찬 피디는 그 쉬는 짬을 이용해 책을 읽고 번역했다.



'영화학교에서 배운 101가지' 연출이 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9개월에 걸친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보스턴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에도 그는 '어떻게 하면 연출을 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나 보다. 책방에서 '101 Things I Learned in Film School'라는 영어 원서를 골라 집어든 걸 보면. 휴가 중에 그는 열심히 책을 읽었고, 자신과 같이 좋은 연출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해 한국에 번역 소개하기로 결심한다. 

나는 책을 받아든 순간에, 이미 임찬에게 하나를 배웠다. '스티브 잡스의 가르침을 몸으로 실천하는 조연출이 여기 있었구나. 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갈망하고, 항상 배우려는 그의 자세에서, 오늘은 내가 배운다.

'영화학교에서 배운 101가지' 정말 좋은 책이다. 친한 후배가 직접 번역한 책이라 하는 말이 아니다. 나 역시 이제까지 영상 문법을 공부하기 위해 많은 영화학 관련 책을 사모았고, 때로는 원서도 뒤져봤다. 그러나 다들 어렵고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정말 쉽고 재밌다. 어려운 말을 쉽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수의 경지가 아니던가! 책은 작지만, 그 가르침은 결코 가볍지 않다. 유튜브 영상 제작 매뉴얼로도 권하고 싶다. 영화학도가 아니어도 영상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필독서다.

마무리는 임찬 PD의 페이스북에 남긴 말로 갈음하련다.

"임찬 피디님의 번역서, '영화학교에서 배운 101가지', 기대만빵입니다.
언젠가 드라마의 거장이 되신 임찬 감독님의 저서, '드라마학교에서 배운 101가지'를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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