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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은퇴자의 세계일주

은퇴한 피디는 어떤 악몽을 꾸는가

by 김민식pd 2022. 7. 13.

드라마가 막바지 촬영에 달했어요. 갑자기 조연출이 달려옵니다.

"감독님, ***배우님이 마지막 장면은 안 찍겠다고 하시는데요."

"엥? 무슨 일이야?"

"원래 작가랑 약속한 엔딩이랑 다르대요. 비록 극중 악역이지만 마지막엔 폼나게 퇴장하는 모습으로 그린다고 했는데, 대본으로는 비참하게 망하는 걸로 끝났다고요. 대본 수정하기 전엔 촬영 안 하신대요."

헉! 당장 이번주 방송분인데 이제와서 대본을 고치라고 하면, 다른 배우들 출연 장면이랑 이야기의 흐름이 어긋납니다. 어떡하지? 배역 욕심이 많은 배우라는 소문을 듣고 살짝 걱정은 했지만, 작가님이 워낙 애정을 보인 분이라 믿고 갔어요. 결국 이 사달이 나는군요. 작가는 마지막 대본 넘기고 잠수를 탔고, 배우는 수정없이는 안 찍겠다고 제 전화도 받지 않고 있어요. 중간에서 매니저가 죄송하다고 싹싹 빌지만 그나 나나 장기판의 졸인걸 어떻게 하나요. 아, 미치겠다. 어떻게 하지? 머리를 쥐어뜯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 근데 나 얼마 전에 회사에 사표 쓰지 않았던가?

현실과의 괴리를 인지하는 순간, 잠에서 깼어요. 휴우, 꿈이구나. 명예퇴직하고 한 동안 잠이 들면 드라마 촬영하는 꿈을 꿨는데요. 하나같이 악몽이었어요. 녹화날 아침에 배우가 응급차로 실려가는 바람에 촬영이 펑크나는 꿈, 최종 편집본 파일이 서버 다운으로 날아가서 다시 밤을 새워 편집하는 꿈, 사흘을 내리 밤을 샌 소품팀 막내가 도망가는 바람에 촬영이 펑크나는 꿈. 하나같이 악몽인데요. 다 제가 24년간 연출로 일하며 겪은 일들이 생생하게 꿈으로 나타났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아, 드라마 감독으로 일하는 게 은근히 스트레스였구나.'

그리스 여행중에 <아주 사적인 신화>라는 책을 읽었어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때로는 황당무계하고 막장 연속극 같아요. 신화는 그걸 만들고 즐긴 이들의 심리와 욕망을 보여줍니다. 책에는 이런 대목이 있어요.

'분석심리학에서 꿈은 신이 말하는 신탁의 장소이자 내 무의식의 전갈이다. 꿈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우리를 ‘각성’시키기 위해서다. 꿈은 우리가 늘 반복하는 어리석은 일들을 그만두라고 조언한다. 나는 뭐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할 때 꿈은 그게 괜찮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내가 숨죽이고 가만히 있을 때 꿈은 가만히 있을 일이 아니라고 소리친다. 내가 억울하지만 그냥 참기로 결정할 때 꿈은 절대로 그냥 넘기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꿈은 끊임없이 의식으로 화살을 전달해주고 있다.'

<아주 사적인 신화 읽기> (김서영)

사람은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갑니다. 함께 일하는 저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이다, 라는 걸 인정해버리면, 회사에 나가 그 사람의 지시를 받으며 계속 일을 하는 게 힘들어지거든요. 그래서 모른 척 눈을 감고 살아갑니다. 꿈은 솔직합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가 꾸는 꿈은 무의식의 세계가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꿈을 좇아 피디가 되었습니다. 영어 공부삼아 시청한 미국 시트콤이 너무 재미있었어요. 시트콤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갑니다. 통역사에게는 자신의 의지가 없어요. 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충실하게 옮기는 직업이죠. 나는 나의 욕망을 더 긍정하고 싶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만들기 위해 피디가 되었죠. 그런데 피디 역시 타인의 꿈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직업이었어요. 작가가 대본에서 그린 욕망을 충실히 화면에 옮기고, 예뻐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싶은 배우들의 욕망을 영상으로 실현시키고, 밤을 새우기보다는 일찍 퇴근하고 싶은 스태프들의 욕망을 보듬어야 합니다. 그 와중에 시청률, 제작비, 광고판매율이라는 3개의 숫자를 부여잡고 성과를 내기 위해 씨름해야 하고요. 피디는 결국 타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몇번 악몽에 시달린 후, 깨달았어요. 나는 수십년 동안 타인의 욕망을 실현하며 살았구나, 이제 은퇴했으니 나의 욕망을 돌보며 살고 싶습니다.  

작년 성탄절에 중학생 딸이 제게 선물을 줬어요. 퇴직하고 동네 산책하고 집에서 책만 읽으며 지내는 저를 보고 돈많은 백수라고 놀리던 아이가 제게 저 모자를 선물하며 그랬어요.

"아빠는 이제 자유인이잖아.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며 살아."

파르테논 신전을 보며 궁금했어요. 이걸 지은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스인들은 신에 대한 존중만은 진심이었어요. 이교도인 페르시아인들이 몰려와 신전을 불태워버리자, 전쟁에서 승리한 후 다시 건설하죠. 당시 아테네의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가 막대한 공사비를 들여 신전을 짓는데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걸 보고 반대파에서 이걸 기회삼아 페리클레스의 실각을 도모합니다. 국고 낭비라고 입에 거품을 문 거죠. 그러자 페리클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국비를 투입할 가치가 없다면 비용 전액을 내가 부담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럴 경우 완성된 신전 앞에 ‘이곳은 페리클레스가 개인 돈으로 완성했다’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겠습니다. 따라서 시민 여러분은 지금처럼 국비로 공사를 계속할지, 아니면 앞으로 내가 부담해서 공사를 계속할지 결정해주기 바랍니다."

<그리스인 이야기 2 : 민주주의의 빛과 그림자> (시오노 나나미)

아테네 시내 여행을 하다보면, 어디에서든 저 멀리 아크로폴리스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 보여요. 지금 봐도 놀라운 건축학의 경이인데, 2500년 전에는 어땠겠어요? 마침 페르시아를 무찔러 아테네의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에요. "야, 우리가 가오가 없냐, 돈이 없냐." "까짓것 그냥 국비로 공사를 속행합시다!" "파르테논 신전은 도시국가 아테네 시민 전원의 것!" 이렇게 결정을 내려요.

당시의 아테네는 민주정이었어요. 시민집회에서 민의를 모아 정치적 결정을 내렸는데요. 페리클레스가 시민들의 자부심에 어필한 덕분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각지에서 올라온 예술가와 조각가들이 혼을 불살라 여신에게 바칠 신전을 완성합니다. 페리클레스는 원대한 비전을 가진 지도자였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그리스를 찾는 많은 여행자들은 파르테논을 보러 오고요. 그 장엄한 경관에 감탄을 금치 못하지요. 2500년 후 후손들까지 먹여살리는 지도자, 페리클레스. 

우리가 여행을 떠나 보는 과거의 유적은 대부분 왕의 명령에 따라 지어진 것들이에요. 만리장성을 지은 진시황이나 무덤으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지은 쿠푸 왕을 생각해봐요. 노예들이나 일반 백성들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공사에 동원되고 죽어갔지요. 파르테논 신전은 자유인들이 자유의지를 갖고 지은 건축입니다. 그래서 더 놀라워요.

아테네인들은 목숨을 걸고 자유를 희구했습니다. 열 배 이상 압도적 전력의 차이를 보이는 페르시아 제국의 군대가 위협해도 자유 시민 답게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싸움터에 나섰어요. 페르시아 군대는 정복지에서 포로로 잡거나 위협을 통해 제국에 흡수된 병사들로 이루어져 있어요. 아테네 중무장 보병은요, 시민이 스스로 무기와 방패를 구입해 전쟁터로 나섭니다. 페르시아 제국군과 아테네 중무장 보병의 전투는 그래서 양과 질의 싸움이었어요. 고대 아테네에는 왕이 없는 민주정이었어요. 페르시아 군대가 황제를 위해 싸울 때, 아테네 시민들은 자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어요.


인류의 역사는 목숨을 걸고 자유를 지켜온 이들과 함께 발전했어요.

지금 이 순간, 제게 주어진 자유를 더욱 소중히 여기며 살렵니다.

중년 백수의 그리스 여행, 크레타 섬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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