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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은퇴자의 세계일주

비극의 탄생지, 디오니소스 극장

by 김민식pd 2022. 7. 6.

어린 시절, 저의 꿈은 세계일주였어요.

은퇴하고 세계여행을 다니는 날을 꿈꾸며 영어책을 외웠죠. 막상 퇴직을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ㅠㅠ 괜찮아요. 우리에겐 제주가 있으니까. 1년 열 두 달 제주 여행을 다니며, 해외 방문의 기회가 다시 생기기를 기다렸습니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어디로 여행을 떠날까? 아직 한번도 못 가본 나라로 가자. 너무 많죠. 그 중에서 가장 먼저 가고 싶은 곳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그리스였어요.

서양 문명의 발상지,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무대,

철학과 예술이 시작된 그곳에서 은퇴 후 여행을 시작하는 거죠.

2022년 6월 4일~24일. 그리스 방랑 일기, 시작합니다.

 

항공권 검색을 했어요. 유럽 여행 100만원 이하 항공권 찾기가 쉽지는 않더군요. 아랍에미레이트의 수도, 아부다비를 경유하는 에티하드 아테네 왕복 항공권을 91만원에 예약했어요.  

하늘에서 본 아부다비의 모습... 사막의 도시란 이렇게 녹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이구나... 실감했어요.

비행기 기장의 안내 방송이 들려요.

"탑승객 여러분, 저희는 이제 아시아 대륙을 떠나 그리스로 향하는 바다 위를 날고 있습니다. 오른쪽 아래로 크레타 섬이 보입니다."

오홀! 크레타! 딱 기다려! 곧 찾아가줄테니!

그리스 도착한 다음날 아침 일찍 아테네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전철을 타고 아크로폴리스 역에 내리니 웅장한 언덕과 성채가 보입니다.

 
아크로폴리스 입장 단일권이 20유로, 콤보권이 30 유로. 콤보권은 우리 돈으로는 4만원 조금 넘네요. 입장권이 꽤 비싸지만, 그래도 콤보권을 사는 걸 추천합니다. 아테네 여행을 확실하게 하려면 티켓은 꼭 콤보로 사세요.

오전 8시, 문이 열리자 마자 입장합니다.

파르테논 신전이 가장 유명하지만, 아크로폴리스에는 다양한 유적이 있어요.

오전 8시 10분. 디오니소스 극장.

기원전 6세기에 만들어진 인류 최초의 극장입니다. 그 시절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무언가를 즐기기 위해 건축물을 만들었다니... 이게 로마의 콜롯세움에 영향을 준 원형이랍니다. 살짝 초라해보이지만 그래도 그리스 비극의 탄생지에요.

기원전 429년에 아테네 사람들이 즐긴 공연된 비극 중 아직까지도 유명한 작품은 오이디푸스입니다. 아버지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을 받고 태어난 아기. 들판에 버려졌다가 목동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가 다른 나라로 가 양부모 아래서 자라요. 오이디푸스는 어른이 된 후, 자신이 주워온 아이라는 소문을 듣습니다. 오이디푸스는 아폴론의 신전에 가서 출생의 비밀에 대해 묻습니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맺어질 운명이라는 끔찍한 신탁을 듣고 집을 나와 방랑길을 떠나죠. 언덕길에서 마주친 마차와 길을 놓고 다투다 마차의 주인을 죽이는 오이디푸스, 그 노인이 자신의 생부라는 걸 알 수는 없죠.

"아침에는 다리가 넷, 낮에는 다리가 둘, 저녁에는 다리가 셋인것은?" 라고 묻는 스핑크스의 질문에 "사람."이라는 답변을 내놓아 괴물을 퇴치합니다. 그 공로로 남편을 잃은 왕비와 맺어지고요. 왕이 되어 나라를 지배하는데, 테베에 역병이 돕니다. (전염병의 창궐은 인류 역사와 늘 함께 했군요.) 선왕 라이오스를 살해한 자에 대한 신들의 분노 탓에 역병이 돈다는 말에 오이디푸스는 살인자를 찾으라는 영을 내립니다. 그 조사 결과, 자신이 홧김에 죽인 마차의 주인이 선왕이었고, 지금의 아내가 바로 자신의 어머니라는 걸 알게 되지요. 왕비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찔러 맹인이 된 후 추방됩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 정도로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오이디푸스 왕은 선왕 살해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다 끔찍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극중 예언자 티레시아스의 대사.

“지혜는 그 지혜의 소유자에게 어떠한 이익도 줄 수 없을 때 끔찍한 재앙이 된다.”

(위에서 본 디오니소스 극장)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읽고 신들이 너무 잔인하다고 여겼어요. 주인공에게 주어진 운명이 너무 가혹하죠. 그리스 사람들은 이런 비극을 저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함께 즐겼어요. 비극의 주인공은 신에게 바친 제물, 즉 희생양입니다. 희생양은 영어로 scapegoat, 양 lamb이 아니라 염소 goat. 

비극은 영어로 tragedy인데, 그리스어 '트라고디아tragoidia'에서 왔어요. '숫염소tragos의 노래 aoide'. 숫염소를 디오뉘소스 신에게 바치며 부르던 진지하고 신성한 노래였다고요.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며, 인간을 초월한 존재인 신에게 축복을 기원하는 것이죠. 신의 축복을 받을 자격을 갖추려면 죄로 얼룩진 나 자신을 깨끗하게 만드는 회개와 거듭남의 의식이 필요합니다. 죄를 지어 죽어 마땅한 나 대신에 내 죄를 짋어지고 죽어가는 희생양이 필요하고요.

죄를 진 나를 대신해 희생양을 바치고, 내가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종교적 정화, 즉 카타르시스의 과정이 비극입니다. 무대는 제단이고, 무대 위의 주인공은 제단 위에 바쳐진 제물입니다. 무대 위의 주인공은 욕망과 격정에 휩싸여 잘못을 저지르고 고난과 시련에 빠집니다. 오이디푸스도 한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해 생부를 죽이고 계시를 완성합니다. 객석의 관객은 자신의 눈을 찔러 속죄하는 무대 위의 주인공을 바라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비극이란, 희생양을 무대에 올리고, 주인공과 함께 시련을 겪는 체험의 시간이었던 거죠.

어쩌면 이곳 디오뉘소스 극장이 제 직업인 드라마 피디의 근원이겠군요. 드라마를 보며 시청자들은 주인공의 고난과 시련을 함께 겪고, 결말에서 권선징악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손상이 많이 되어 좀 초라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요. 저래보여도 약 17000명을 수용 가능한 규모였어요. 당시 아테네 인구가 약 15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요. 당시로서는 도시 전체 인구의 10분의 1을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규모죠. 

극장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는데, 앞서 가던 사람이 땅바닥에 카메라를 대고 연신 사진을 찍어대요. '응? 바닥에도 고대의 유물이 있나?'

거북이 어르신 한분이 산책 중...

아크로폴리스 산책하다보면 야생 거북을 자주 만나요. 이곳은 아테네 신전이 있는 곳, 신들의 영역이라 사람들이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지요. 게다가 차량이 없으니, 안전하기도 하고요. 거북이도 신들의 가호 속에 편안한 삶을 구가하는 곳, 아크로폴리스~

8시 20분. 언덕을 오르다 오른 편에 있는 폐허같은 유적을 그냥 지나칠뻔 했는데요.

설명을 읽어보니 '건강과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이네요. 기원전 420년에 만들어진 곳. 이렇게 설명을 읽어봐야 알 수 있어요. 그냥 보면 돌무더기 같아요.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의 아들입니다. 아폴론은 의술의 신인데요. 역병을 퍼뜨리는 신이기도 해요. 아폴론이 화살을 쏘면 도시에 역병을 퍼져 삽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죠. 그리스 신화를 보면 옛날에도 역병은 무서웠나봐요. 역병을 퇴치하는 것 또한 아폴론의 역할이었기에 의술의 신으로 불리었는데요. 나중에 아들인 아스클레피오스에게 의술의 신 자리를 물려줍니다. (아, 신들도 직업을 대물림하네요. 옛날에는 직업을 대물림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공교육이 없던 시절, 어떤 직업과 기술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는 드무니까요.)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술이 워낙 뛰어나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는데요. 인간이 불사의 능력을 얻게 되는 걸 두려워한 제우스가 번개를 내리쳐 아스클레피오스를 죽입니다. 아폴론은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여 제우스에게 부탁해 하늘의 별자리로 만들어주죠. 그 별자리가 '뱀주인자리'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은 지팡이를 감고 있는 두 마리의 뱀인데요.

아테네 시내를 다니다, 간판에 이런 그림이 있으면 거기가 약국입니다.

여기에요, 여기~

오전 8시 30분, 헤로데스 아티쿠스 음악당. 이곳에서는 아직도 공연이 열리고 있어요. 여름에 열리는 아테네 페스티벌의 메인 무대지요. 

아크로폴리스 언덕에서 아테네 시내를 굽어다보며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곳. 

전세계에서 온 여행자들이 음악당 앞 계단에서 쉬고 있어요. 문득 그리스 여행을 앞두고 읽은 김헌 선생님의 책의 구절이 떠올랐어요. 뮈케네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에피다우로스에는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이 있는데요. 치유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거룩한 신전이라고요. 

'극장과 스타디온, 목욕탕 등 신전 부속 건물들을 두루 둘러보면, 에피다우로스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이었다고는 하지만, 정말로 쉬면서 놀기 딱 좋은 곳이다.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치료의 핵심이 수술과 투약처럼 보이지만 예전에는 휴양과 축제를 치료의 핵심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치료 절차도 재구성해보면 요양의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이곳에 환자가 오면, 일단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식이요법에 맞춰 식사를 했다.

무엇보다도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신전에 들어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기도하고 명상에 잠겼으며, 신전 바닥에 누워 숙면을 취했다. 숙면의 목적은 꿈에 아스클레오피스 신을 만나는 것이었다. 

환자들은 의학적인 처방에 따라 열심히 치료도 받았지만, 틈틈이 운동도 하고 극장에서 음악과 연극을 관람하면서 몸과 마음을 추슬렀고, 운동대회가 열리기라도 하면 열정적으로 응원하면서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 수많은 환자들이 기적적으로 치유를 경험했는데, 아하, 이것이 과연 신이 부린 신통한 조화였을까, 아니면 그렇게 하면 누구라도 좋아지게 마련인 자연스러운 결과였을까?'

<신화와 축제의 땅, 그리스 문명 기행> (김헌 / 아카넷)

개인적으로 2020년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명예퇴직을 선택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고요. 여행 떠나기 1달 전에 자전거 사고도 났지요. 고난과 시련이 올 때, 저는 여행을 선택합니다. 여행을 하며 구경을 다닙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쉬고 싶을 땐 쉬어요. 사는 게 힘들 때, 저는 여행이 주는 '치유의 힘'을 믿습니다.

3주간의 그리스 치유 여행, 다음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 극장을 배경으로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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