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국내여행

두려움보다 설렘

by 김민식pd 2022. 3. 2.

(<월간 에세이> 2021년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여러분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불행한 은퇴자들입니다.”

2020년 말, 명예퇴직을 선택한 내게 국민연금공단 강사가 말했다. “퇴사자들은 퇴직금과 자유로운 시간을 얻었으니 평생의 로망을 실천하죠. 크루즈를 타거나, 산티아고를 걷거나, 유럽여행을 떠나거나. 코로나가 터져 해외여행이 봉쇄되었으니 여러분은 참 불운한 은퇴자인 겁니다.”

나는 MBC PD로 24년을 일했다. 지난 몇 년 새, 유튜브가 인기를 끌고 넷플릭스가 들어오고 미디어 광고 시장이 변했다. 2020년 말, 회사는 구조조정을 결정했고, 나는 명퇴를 신청했다. 회사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가면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난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쉬고 싶을 때 쉰다. 은퇴를 하면 1년간 세계 일주를 하며 갭이어를 갖는 게 오랜 꿈이었는데, 코로나에 발목을 잡혔다. 어떡하지?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제주도였다. 퇴사한 다음 주에 나는 제주도로 갔고, 올레길을 걷고 한라산에 올랐다. 눈 덮인 한라산의 모습은 절경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안나푸르나와 파타고니아 좋은 줄만 알았지, 우리나라에도 이런 멋진 설경이 있는 줄은 몰랐다. 수년 만에 제주에 내린 폭설로 공항이 마비되고, 서울로 돌아오는 하늘길이 끊겼지만 괜찮다. 나는 은퇴자니까.

아침을 해결하려 식당에 들렀더니, 사장님이 “여행 오셨나 봐요?” 하더라. “네, 제주도는 날씨 좋은 봄가을에만 왔지, 한겨울에 온 건 처음인데요. 1월의 제주도 참 좋네요.” 그랬더니 사장님 말씀. “제가요, 뭍에서 제주 온 지 5년 되었는데요, 여기서 살아보니까, 제주도는 1년 열두 달 다 좋아요.”

사장님 말씀에 문득 가슴이 뛰었다. 1년 내내 좋은 제주, 매달 한 번씩 오면 어떨까? 그래서 ‘1년 열두 달 제주’가 내 은퇴 생활의 테마가 되었다. 1월엔 성산포, 2월엔 서귀포, 3월엔 모슬포에 갔다. 한 곳에서 사나흘 씩 묵으며 숙소 근처 올레길을 걸었다. 2016년 가을에 자전거로 제주도 일주를 한 적이 있는데,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그랬다. “연세도 있으신데, 자전거로 다니면 힘들지 않으세요? 다음에는 스쿠터로 해보세요. 훨씬 편해요.” 그래서 4월에는 스쿠터를 빌려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았다. 자전거 여행도 좋지만, 스쿠터 일주도 재밌었다. 귀가 얇은 덕분에 인생이 즐겁다.

1월 둘째 주에는 설악산의 설경을 보러 속초에 갔다. 기상 악화로 대청봉은 못 오르고 울산바위까지만 갔다. 다음날, 속초에서 양양까지 바닷가 산책로인 해파랑길을 걸었다. 양양해변을 지나는데, 한겨울에도 서핑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혹한의 추위가 몰아닥친 1월의 강원도에서 파도타기를 하다니, 도대체 저게 얼마나 재미있길래? 그래서 쉰넷의 나이에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다.

누가 물었다. “사표를 낼 때, 두렵지는 않았나요?” 명예퇴직 소식을 접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건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이었다. 정년보다 7년 일찍 은퇴하면 7년간의 휴가를 얻게 된다. 읽고 싶은 책도 많고, 걷고 싶은 길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내게, 7년이란 시간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불운한 은퇴자, 코로나의 시대를 살아가는 퇴직자지만, 괜찮다. 매일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한다. 오늘은 어떤 책을 만나고, 어떤 길을 걷고, 어떤 파도를 타게 될까. 두려움보다 설렘의 힘을 믿는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