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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국내여행

눈 내린 날 창덕궁 여행

by 김민식pd 2022. 3. 1.

2021년 2월 16일의 일기입니다.

오전에 시내에 일이 있어 나갔는데, 일을 마치고 보니 창밖으로 눈발이 날리고 있었어요. 1월에 눈 오던 날, 경복궁의 풍경이 떠올랐어요. 아, 이런 날 궁궐 구경을 가도 좋겠구나. 걸어서 창덕궁에 갔습니다. 지난번에는 갔다가 표를 끊어야 한다기에 발길을 돌렸어요. 3000원이 아까워 그냥 지나쳤으니 나도 참... 그런데 서울에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이 1년에 얼마나 될까. 색다른 풍광을 놓치는 게 아까워 표를 샀어요.

궁궐 위로 눈이 소복소복 쌓이네요.

기와에 눈이 쌓이니, 백발이 성성한 노인처럼 보여요.

한옥 사진을 찍을 때, 처마와 기둥으로 앵글을 만드는 걸 좋아합니다. 공간에 깊이가 생기거든요.

한참 걷다보니 또 매표소가 보이네요. 창덕궁 후원을 관람하려면 추가로 표를 사야 한다고요. 평소라면, '표는 하루에 한 장만 끊는다!'며 그냥 발길을 돌렸겠지요. 오늘은 눈이 내려 세상 예쁩니다. 이런 날이 흔하지는 않으니 표를 두 장 더 삽니다. 내친 김에 창경궁까지 보려고요. 창덕궁 후원의 경우, 시간제로 표를 파는데 12시 59분에 도착했는데 오후 2시와 3시표는 매진인데 마침 1시 표는 딱 한 자리가 남았어요. 얼른 삽니다. 놓칠까봐. 이래서 제가 홈쇼핑을 안 봅니다. "다 팔리고, 딱 5개 남았네요."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집어들거든요. Fear of missing out 포모 증후군? 남들 다 하는 데 혼자 뒤처질 순 없다? 네, 좀 뒤처져도 되는데 말이지요. 

창덕궁 후원에 들어오니 입이 딱 벌어집니다. 서울 시내, 그것도 종로 한복판에 이런 풍경이 있었다니!

연못과 정자가 있는데, 그 뒤로 보이는 건물이 규장각입니다.

선비들이 모여 공부를 하고 일을 하던 곳이니, 궁궐의 정원은 유교에서 생각한 낙원의 이미지를 구현한 게 아닐까요? 병풍처럼 나무가 둘러싸고 중앙에 연못이 있고 한쪽에 작은 정자가 있습니다. 

오늘의 질문 : 세상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200년전만해도 우리나라는 신분제 사회였어요. 낙원을 구현한 궁궐의 풍경은 왕이나 양반들만 봤을 거예요. 양반 중에서도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만. 높은 벼슬을 하는 정승도 여기서 여유롭게 조망을 즐길 수는 없을 거예요. 왕의 눈치를 살폈겠지요. 이제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신분제가 가고, 자본주의가 왔어요. 돈 5000원을 내면 누구나 마음 편히 멋진 풍광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기던 걸, 다수가 공평하게 즐기는 게 세상의 발전을 뜻하는 것 아닐까요? 지금 우리들 다수가 누리는 건, 100년 전에만 해도 소수의 선택받은 이들만 즐겼던 게 아닐까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풍광은 어쩌면 200년 전 어느 시골 선비가 간절히 보고 싶었던 그런 광경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산책로에 소복이 쌓인 눈을 조심조심 밟으며 후원 이곳 저곳을 돌아봅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풍광이 달라집니다. 궁궐의 정원을 여간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놓은 게 아니에요. 가끔 표지판을 보며 건물에 대한 설명까지 읽으니 역사 공부와 도보 여행을 함께 즐기는 기분입니다.

대청에 앉아 가만히 생각해보니, 노후에도 돈은 계속 벌어야 할 것 같아요. 오늘 같은 경우, 5000원이 아까워 발걸음을 돌렸다면 이 좋은 풍광을 놓쳤겠지요. 값비싼 명품을 소유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보고 듣고 즐기는 경험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돈을 쓰고 싶습니다. 눈이 내리면, 5000원을 내고 창덕궁 후원에도 오는 삶. 그게 제가 꿈꾸는 노후입니다. 

눈이 내린다고 냉큼 궁궐 나들이를 할 수 있는 것. 은퇴했으니 가능한 일이지요. 정규직보다 시간의 자유를 누리면서 약간의 소득을 올릴 방법을 계속 찾을 겁니다. 은퇴자의 자유를 누리면서, 재정 자립을 지키기 위한 노력, 함께 할 생각이에요.

창경궁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궁궐 주위를 둘러싼 고층 빌딩을 보니 이곳이 서울 시내라는 게 실감나네요. 잠시 시간여행을 떠난 것 같아요. 

이날 찍은 사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입니다.

울긋불긋 단청과 기와에 쌓인 하얀 눈의 조화.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 하고 하얗게 머리가 새어가는 궁궐의 모습이 문득 내 자신 같아 애틋한 마음이 들었어요.

2021년의 2월, 

외로움을 견디며, 세월은 또 그렇게 흘러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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