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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추운 겨울, 어떻게 날 것인가

by 김민식pd 2022. 1. 14.

매달 한 번씩 만나 책 이야기를 나누는 회사 후배가 있어요. 한 달 동안 읽은 책 중 좋았던 책을 서로 추천하면 다음 만남에서 그 책을 읽고 느낀 점을 함께 나눕니다. 어느 날 그 후배가 한 달 동안 책을 거의 읽지 못해 추천할 책이 없다고 고백했어요. “회사 일이 그렇게 바빴어?” 하고 물어보니 휴대용 게임기 닌텐도 스위치로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하 ‘모동숲’)을 하느라고 그랬대요. 한 달에도 수십 권씩 책을 읽는 독서광이 게임 하느라 책 한 권 읽지 못했다니, 그게 그렇게 재미있나?

코로나가 터지고 <모동숲> 타이틀이 품귀 현상을 일으켰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까 가상현실 공간으로 이주를 떠나는 게임에서 대리만족을 한 건가? 명퇴 신청서를 내고 닌텐도 스위치를 주문했어요. 퇴직하고 남는 시간에 게임을 한번 해볼까? ‘모동숲’을 시작하자 나도 바로 빠져버렸어요.

그 시절, 저는 정말 외로웠습니다. 한겨레 칼럼 사태 이후, 사람을 만나는 게 두려웠어요. 평소 내가 좋아하던 작가들이 온라인에 글을 올려 나를 비난하는 모습을 보고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차를 마시며 웃고 떠들다가도 혹 누가 나를 보고 ‘신문 칼럼으로 사고 친 그 인간,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이러고 있음’이라고 SNS상에 글이라도 올릴까 두려웠어요. 누가 나를 알아본다고. 그만큼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였지요.

만나자는 약속도 물리치고 칩거하며 지내다 ‘동물의 숲’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미키타임님(게임 속 나의 닉네임), 어제 저녁에 내린 별똥별 봤어?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빌면 꿈이 이루어진대.” “와, 새로 산 모자야? 멋지다.” “2층을 새로 지었더라? 멋진 방을 꾸며보라고 집들이 선물을 보내니까, 방에다 꾸며봐.” 말을 걸어 주고, 새로운 미션을 완수할 때마다 모여서 축하 파티를 열고 선물을 줬습니다. 게임 속 NPC(Non-Player Character)들이라 그들이 하는 행동이나 말은 다 자동 실행 프로그램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위안을 얻었습니다.

현실의 나는 한방에 사라졌습니다. MBC 김민식 피디도, 한겨레 칼럼니스트 김민식도, 유튜브 진행자 김민식도. 하지만 나는 동물의 숲에서 미키타임으로 다시 태어났어요. 무인도로 이주를 떠난 나는 그곳에서 만난 동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고, 정원을 꾸몄습니다. 낚시로 물고기를 잡고 곤충을 채집했습니다. ‘모동숲’의 재미에 빠진 어느 날, 둘째에게 게임기를 건네줬어요. 겨울방학이 왔지만, 코로나로 바깥 출입도 못하며 갑갑한 시간을 지내던 중학교 1학년 딸도 금세 빠져들었어요.

딸과 대화가 더 풍성해졌습니다.

“아빠, 오늘의 고가 매입품은 뭐야?”

“응 오늘은 원목 테이블이야.”

“아, 단단한 목재가 부족하네.”

“아빠가 나무해다가 집 앞에 갖다 놓을게.”

“고마워, 아빠. 파타야가 어제 내게 레시피 하나를 줬는데, 나는 예전에 너굴 상점에서 산 거라서 필요 없거든. 아빠한테 줄게.”

“해변에 놓아두면 아빠가 잽싸게 주워갈게!”

아빠와 아이가 함께 취미 생활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게임을 하는 가장 큰 이유였어요. 식탁에서 아빠와 딸이 게임을 주제로 도란도란 수다를 나누는데, 그 모습이 부러웠는지 평생 게임을 하지 않던 아내까지 닌텐도를 집어 들었어요. 아내 역시 바로 ‘모동숲’ 에 빠져들었습니다. 꽃을 가꾸는 걸 좋아하는 아내는 섬 곳곳에 꽃씨를 뿌리기 시작했어요.

“오늘은 비가 오네? 얼른 장미 모종을 사서 개울가에 심어야겠다.”

“엄마, 내가 엄마 꽃밭에서 호박 좀 따가도 돼? 호박 랜턴을 만들려고.”

온 가족이 가상의 섬으로 주말 귀촌을 한 것 같았어요. 나는 나무를 패서 가구를 만드는 걸 좋아하고, 아이는 낚시를 좋아하고, 아내는 꽃을 가꿉니다. 서로 다른 취향이 하나의 섬에서 어우러져 우리 가족의 섬 생활이 더 풍성해졌어요.

아이에게 닌텐도 스위치를 건넬 때, 분명하게 밝혔어요. 이건 아빠의 장난감이라고. 30년간 일하느라 고생한 아빠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고. 민서는 주말에 하루 30분씩 시간을 정해두고 빌리는 거라고. 다행히 아이가 원칙을 순순히 따랐어요. 학교 온라인 수업 중에 혹시나 게임기를 붙들고 있을까 봐 외출할 때 숨기기도 했는데, 나중에 보니 기우였어요. 시험 기간에는 스스로 게임을 폐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자발적으로 ‘모동숲’을 그만뒀습니다.

“왜 요즘은 안 해?”

“응, 그냥 바빠서.”

오늘의 질문 : 힘들 때는 꼭 책을 읽어야 하나요?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각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취미 활동의 기준은 다양합니다. 게임이나 음악 감상, 영화 보기 등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됩니다. 힘들 때 무엇으로 자신을 응원할 것인가? 그것을 찾는 게 평생의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잘 놀기 위해 읽은 책도 있어요. 

<잘 쉬는 기술 :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휴식법 10가지 | 클라우디아 해먼드 저/오수원 역> 



책을 보면 사람들이 휴식이라고 여기는 상위 10개 활동이 나오는데, 놀라운 점이 있어요. 친구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은 12위였어요. 다른 사람을 만나 시간을 보내는 행위는 휴식 중 상위 10위 안에 못 들더라고요. 저자가 조사한 조건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는 활동이 아니라 ‘가장 휴식이 된다고 느끼는 활동’입니다. ‘쉰다는 느낌을 주는 상위 5위까지의 활동’이 모조리 ‘혼자서 하는 활동’입니다. 18,000명에게 설문 조사를 하고 찾아낸 잘 쉬는 기술 다섯 가지를 살펴보면, 5위, 아무것도 안 하기. 4위 음악 감상, 3위, 고독을 즐기기, 2위 자연 속에서 휴식하기였어요. 즉, 사람은 휴식을 취할 때 타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 거죠. 잘 쉬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휴식 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한 활동, 즉 가장 인기 있는 휴식의 기술이 책 읽기로 밝혀졌음을 먼저 밝히게 되어 기쁘다. ‘집단 지성’에 관한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1만8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틀렸을 리는 없지 않겠는가. 책이 주는 휴식을 만끽하시라. 독서보다 편안한 휴식은 없는 듯하다. 더구나 휴식에 관한 책을 읽는 것보다 휴식이 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위의 책, 서문에서)

드라마 피디로 일할 때 밤을 새워 일을 할 때, 힘들 때마다 나는 편집실 구석에 앉아 책을 읽었어요. 촬영을 마치고 동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러 갈 때도 나는 혼자 남아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어야 머리가 맑아지고 제대로 쉰 기분이었어요. 알고 보니 독서가 최고의 휴식이었군요.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에요.

게임을 해도 좋구요. 책을 읽어도 좋아요. 혼자서도 상처받지 않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즐거운 주말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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