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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절망의 죽음을 어찌할 것인가

by 김민식pd 2022. 1. 17.

퇴직하고 매일 출근하는 곳이 있어요. <예스24 북클럽>입니다. 전자책을 무제한으로 대여할 수 있는 온라인 북클럽인데요. 요즘처럼 날이 쌀쌀할 때는 도서관에 가지 않고, 침대에 누워 그날 신규로 올라온 책을 살핍니다. '오늘은 어떤 책을 읽을까?' 신문 서평란에서 인상적으로 본 책이 올라왔네요.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 중년의 삶은 어떻게 비극으로 내몰리는가> (앵거스 디턴,앤 케이스 저/이진원 역)


예전에 <팩트풀니스>를 읽다가 생긴 의문이 있어요.


오늘의 질문 : 미국은 우리보다 더 잘 사는 나라고, 의료 선진국인데, 왜 기대수명은 우리보다 짧은 걸까?

마약이나 총기 사고로 일찍 생을 마감하는 흑인 청년들이 미국의 평균 수명을 깎는 탓일까 했는데요. 의외로 중년의 백인 사망률이 높답니다. 경제가 발달하면 사망률이 낮아지고 수명이 늘어나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걸까? 놀랍게도, ‘불의의 중독’이 중요한 원인으로 밝혀졌다. (...) 자살, 약물 과다복용, 알코올성 간질환, 이 세 가지 원인으로 인한 사망률이 가장 빠르게 올라갔다. 이런 종류의 죽음은 모두 자해에 의한 것이다. 총을 쏘면 순식간에, 약물에 중독되면 총보다 느리고 덜 확실하게, 그리고 술을 마시면 그보다도 더 느리게 숨을 거두게 된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원인에 의한 죽음을 모두 ‘절망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경제적·사회적·심리적 절망 중 어떤 종류의 절망인지는 알지 못했고, 추측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우린 그런 ‘절망’에서 죽음의 원인을 찾았고, 이것은 그런 절망을 심도 있게 탐구한 책이다.'


<팩트풀니스>를 읽다 생긴 고민이 꼬리를 문 독서로 이어졌어요. 사람이 죽으면 사망진단서를 작성해야 하는데요. 진단서에는 고인의 학력을 묻는 칸이 있습니다. 통계를 보니 학사학위가 없는 사람들 가운데서 거의 모든 절망사가 증가했어요.


'4년제 대학 학위가 점점 더 미국을 갈라놓고 있으며 학위가 주는 특별히 이로운 혜택은 시종일관 이 책의 주제다. 학사학위 유무에 따른 격차가 죽음뿐 아니라 삶의 질에서도 커지고 있다. 학위가 없는 사람은 고통, 건강 악화,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의 정도가 커지고 있고, 일하는 능력과 사교성이 떨어지고 있다. 이런 격차는 또한 소득, 가족의 안정성, 지역사회 측면에서도 확대되고 있다. 마치 대학을 못 나온 사람은 붉은 선이 대각선으로 그어진 ‘학사학위’ 글자가 새겨진 원형 주홍색 배지를 달아야 하는 것처럼 4년제 학위가 사회적 지위의 핵심 표지가 됐다.'

1995년에 나온 책, <노동의 종말>에서 제레미 리프킨이 예견했죠. 20세기 산업혁명의 결과, 인간의 육체노동은 기계가 대신하고, 21세기 정보혁명의 결과, 인간의 정신노동은 컴퓨터가 대신한다고요. 여기에 세계화의 물결이 들이닥쳐요. 미국 공장 노동자가 하던 일을 중국 노동자가 대신하고요. 미국 IT 기술자가 하는 일을 인도에서 원격 근무로 수행해요. 세계화와 정보화의 영향으로, 미국 내 일자리가 줄었어요. 저학력 노동자들은 경제활동에서 배제되고 사회에서 자아실현을 할 기회도 빼앗깁니다. 그 결과가 늘어난 절망사입니다.


'2017년 미국에서만 4만 7,000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자살은 절망사다. 그러나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 환경도 사람들이 고통, 외로움, 불안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약물이나 술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덜 극단적으로 보인다. 약물과 술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는 행복감을 유발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은 이러한 중독성 물질들에 내성이 쌓일 수 있으므로 예전과 같은 행복 효과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예전보다 더 많은 양이 필요하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들은 중독된다. (...) ‘이기적인 두뇌’는 단지 습관을 들이는 것에만 관심을 쏟다 보니 사람들의 행동 방법이나, 그들이 초래하는 대혼란이나, 또는 그들이 파괴하는 삶에 대해 신경 쓰지 못하게 만든다.'


두뇌는 이기적이면서 또 효율적입니다. 최소의 비용을 들여 최대의 효과를 얻는 걸 선호하죠. 낯선 일을 할 때마다 최단 경로를 고민하는 게 귀찮아 반복되는 행동은 자동 실행하는 습관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가장 손쉽게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 A라면, 그 A를 반복할 때마다 두뇌는 학습을 합니다. '아, 괴로울 땐 이걸 하면 되는구나.' 그럼 조금만 힘들어도, A에 의존해 고통을 줄입니다.


세상이 바뀌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그럴 때 개인의 차원에서 손쉬운 해결책이 알코올, 담배, 그리고 마약입니다. 책을 보니, 오피오이드라는 마약성 물질을 손쉽게 처방하도록 한 의료계의 로비가 결국 수많은 사람의 죽음으로 이어졌다고요. 특히 민영화된 미국의 의료보험은 정작 치료가 필요한 가난한 사람에게는 너무 비싸 접근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죠. 아플 때,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진통제 대신 알코올이나 약물에 의존하게 되고, 이는 다시 건강의 악화로 이어집니다.


백인 중년 남성의 사망률이 올라간 지역은 미국 내 러스트벨트라고 알려진 공업지역입니다. 베이비부머 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한 노동자들이 평생 공장에서 일하며 가족을 꾸려간 곳이죠. 부모 세대를 보며, 똑같이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이들은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변화 속에 일터를 잃어버렸어요. 익숙한 세상이 사라지자, 혼란스러워진 이들이 익숙한 쾌락을 쫓습니다. 익숙한 쾌락은 중독으로 이어지고 쉽고요. 그렇게 절망사는 늘어납니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 앵거스 디턴과 보건경제학의 귄위자 앤 케이스는 오늘날 미국을 강타한 절망사라는 비극이 어쩌면 머지않아 다른 나라와 다른 세대의 문제가 될지 모른다고 경고합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한국의 자살률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하지요. 저자들은 절망사라는 화두를 통해 미국의 경제 시스템과 사회 전반을 해부하고 우리가 보다 더 공정한 세계로 가야한다고 제안합니다. 불평등과 불공정, 능력주의와 교육 양극화, 경기침체와 실업, 독과점과 정경유착, 공동체 붕괴와 가족 해체까지 다양한 문제를 다루는 책인데요. 우리에게도 필요한 고민입니다.


급격한 사회적 경제적 변화가 찾아올 때,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쉬운 답은 없습니다. 끊임없이 고민해볼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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