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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덕후의 탄생

by 김민식pd 2012. 1. 12.

무림의 숨은 고수 5인방이 한 자리에 모였다. 서로 갈고 닦은 내공을 겨루는 자리! "저는 아내 몰래 앰프를 샀는데요, 집에 가져가면 쫓겨날까봐 지금 회사 사무실에 두고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스피커랑 아직 연결을 못해서 소리는 못 들었지만, 보기만 해도 흐뭇합니다." "저런! 그 아까운 전설의 명기를!" "저는 프로젝터를 샀는데요, 집이 작아서 마루에서 영사 거리가 안 나옵니다. 안방과 마루 사이 벽을 뚫자고 했다가 집사람한테 맞아 죽을 뻔 했지요, 허허허." "벽을 뚫으면 안방을 영사실로 활용할 수 있겠군요! 그런 묘수가 있는줄 몰랐습니다." "심지어 120인치까지 화면이 커진답니다." "역시 대단한 아이디어십니다!" "과찬이십니다. 허허허."

 

내가 10년전부터 활동하고 있는 AV매니아 모임에서 나누는 대화 내용이다. 여기서 AV는 어덜트 비디오가 아니라 오디오 비디오의 준말이다. 나름 영화 좀 본다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하드웨어 정보를 나누고 소프트웨어를 돌려보는 모임이다.

 

무림 고수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사연? 우리는 10년전 DVD 동호회에 리뷰를 올리던 회원들이었다. 10년전 영화광들의 최고 낙은 DVD 수집이었다. 그런데 발매되는 모든 디비디를 다 살 수는 없으니까, 먼저 디비디를 본 사람이 평을 쓰고, 추천 의견을 올리면 회원들이 리뷰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트였다. 그때 게시판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리뷰어들이 게시물에 서로 댓글을 달아주다 친해졌다. 그때 누군가 오프라인 모임을 제안해서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서로 직장, 출신 지역, 학력이 다 다른 30대 아저씨들 다섯 명이 모였는데, 온라인 게시판에서 이미 서로의 공력을 알아본 바, 첫만남에서 바로 친해졌다. 그 자리에서 덕후 5인방의 도원결의를 맺었는데, 내용인즉, '디비디를 공동 구매해서 돌려보자. 5명 회원 각자가 한 달에 2장씩 사서 돌려보면 한 달에 10장의 디비디를 사는 효과가 생긴다. 그렇게 소프트웨어에서 아낀 돈으로 장비를 지르자.'

 

그후 우리는 매달 한번씩 만나서 피터지는 혈전을 벌였다. 공동으로 구입한 10장의 타이틀을 놓고, 누가 어떤 영화를 먼저 가져가 볼 것인가? 해적의 배에다 칼을 꽂거나, 벌린 악어 이빨을 꺽거나, 우리의 복불복 뽑기 게임은 살벌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반지의 제왕 완전판을 먼저 뽑은 이는 탄성과 함께 세리모니를 벌였다. 다른 술자리에서 우리를 보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 보듯 했지만 우리는 즐겁기만 했다. 어쩌겠는가? 우리는 영화광, 40대 덕후들이다.

 

나는 아직도 그 모임을 좋아한다. 모임이 만들어졌을때 총각이던 누군가는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고, 직장인이던 누군가는 창업해서 대박을 내기도 했다. 멤버 중에는 항공사 파일럿도 있고, 컴퓨터 회사 직원도 있고, 증권사 프로그래머도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온라인 커뮤니티를 권한다. 오프라인의 만남은 직장이나 혈연 지연으로 만나는 사이다. 서로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직장내 술자리만 고집하면 삶의 경험치가 한정된다. 학교 과친구만 사귀면, 폭넓은 교류를 할 수 없다. 나는 온라인 커뮤니티 멤버들과 오프라인에서 만나 평소 접하지 못하는 세계를 경험했다.

 

몇년전인가? 모임에서 아이튠즈라는 음악 프로그램 얘기가 나왔다. 무료 프로그램인데 음악 라이브러리 관리에 정말 좋다는 얘기를 했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이튠즈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만 몰랐다. 그게 뭔지... "애플은 맛이 간 컴퓨터 회사 아니에요?" 스티브 잡스의 재림을 그때 알았다.

 

만약 그 모임이 아니었다면, 내 인생에 아이튠즈나 팟캐스트는 없었을지 모른다. 내 주위 드라마 피디들 중에는 아직도 조연출이 구워주는 시디로 '나는 꼼수다'를 듣는 사람이 있다.

 

온라인 게시판에 글을 쓰거나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문화를 즐기고 소비하고 자신만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들이다. 그들과 함께 호흡하는 것 만으로도 시대의 흐름을 쫓아갈 수 있다.

 

온라인 카페에 가보면, 눈팅만 하는 사람이 90%, 댓글 달아 주는 사람이 9%, 적극적으로 글 올리는 사람은 1%에 불과하다. 세상을 지배하는 1%는 못되도 좋다. 다만 무언가 미쳐 사는 1%는 꼭 해보라.

 

인생, 슬쩍 발만 담그고 살지 마라. 그냥 푹 빠져버려라. 그래야 남는다. 미친듯이 놀아본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남는다. 경험이든, 사람이든. 둘 중 하나만 남아도 수지맞는 장사다. ? 돈은 그 다음에 오는 것이다. 올 수도 있고, 안 올수도 있다. 안와도 그만이라고 마음먹고 사시라. 인생 살면서, 좋은 사람 만나 재밌으면 됐지, 더 바라면 과욕 아닌가?


10년간 모임을 하며, 좋은 사람과 즐거운 추억만 남겼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DVD도 남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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