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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

통역대학원 이야기

by 김민식pd 2012. 1. 11.
남녀 한 쌍이 방을 나오자, 기다리던 여학생이 달려가 잽싸게 문을 잡고 소리친다.
"오빠! 방 잡았어! 빨리 와!"
저쪽에서 다른 여학생이 달려온다. 
"야, 너네 둘이 또 해? 니들은 아침에도 했잖아!"
"아침에 한건 성희롱이고, 이번에는 낙태야."

통역대학원에서는 남녀 2인 1조로 스터디를 한다. 한 명이 영어 연설을 읽으면, 다른 한 명이 듣고 통역하는 방식이다. 굳이 남녀 혼성 스터디를 짜는 이유는, 남녀가 관심있는 분야가 다르니까 더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통역을 연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큰 소리로 말하는 통역 스터디는 학생 2명이 빈 강의실 하나를 통째로 쓰기에 방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통역대학원 복도에서는 늘 이런 실갱이가 오고간다. 국제 여성 인권 대회를 앞두고 스터디를 할 때는, 성희롱, 낙태, 매매춘 등의 주제에 따라 다양한 연설문을 준비해야한다. 

갑자기 통대 시절이 떠오른건 어제 밤에 친구들이 모여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눈 탓이다. 졸업한지 15년인데, 친구 중 하나가 통역대학원에서 강의를 맡게 되었다. '우리 그때 통역 수업 어떻게 했지?' 그랬더니 한 명이 말을 꺼냈다. "난 통역 수업에서 딴건 기억 안나고 민식 형 통역한 것만 기억나." 약간 거만해진 표정의 나, "그랬나?" 다들 박장대소. "거짓말을 어쩜 그렇게 잘하는지. 연사가 한 얘기랑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데도 어쩜 얼굴 표정 하나 안 변하고 뻔뻔하게 말을 지어내는지."

고백하자면, 나는 영어를 국내에서 독학한 터라, 영어 연설문 중 안들리는 대목이 많았다. 그런데 통역사가 청중 앞에서 들리지 않는다 하여 당황하는건 서비스 정신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최선을 다하고 봐야 할 것 아닌가. 안들려도 일단 티를 내지 않았다. 앞 뒤 문장 관계를 통해 추론을 해서 안 들린 대목을 그 자리에서 말을 만들어내서 넘어갔다. 그랬더니 다들 날보고 '통역을 하는게 아니라 소설을 쓴다'고 흉을 봤다. 서비스 정신은 좋았을지 모르나, 통역사로서는 완전 빵점이었다.

어제 술자리에서도 15년전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친구들이 놀려댔다. "형은 정말 거짓말을 기가 막히게 잘했어. 연설문을 쓴 나조차 형의 통역을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니까?" "그게 통역이냐? 창작이지." 한차례 퍼지는 웃음을 잠재우며, 큰소리쳤다. "그렇게 창작을 잘해니까 이렇게 피디가 된 거 잖아!"

학창 시절, 공부를 못해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 세상을 살아갈때 필요한 재능은 다양하다. 학교 성적은 오로지 암기력, 이해력 중심으로만 평가된다. 하지만 세상은 암기력과 이해력만으로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학교에서 공부 잘했다고 잘 살고, 공부 못했다고 못사는거 절대 아니다. 

기죽지 말고 버티시라.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만 찾으면 된다.
그대가 먼저 그대의 재능을 찾아 그것을 갈고 닦으면, 언젠가는 세상이 그대를 알아 줄 것이다.

 


예능 피디가 되고서야 알았다.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하는게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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